---------기획취재를 마치며

 
“달래강의 숨결은 살아있다”

 

개발의 대상이 아닌 ‘상생의 대상’
소중한 자원 인정하고 지켜나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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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의 숨결’은 살아있다.

 

멈춘 호흡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숨소리다. 태고적 한반도 탄생 이후부터 시작됐을 그 숨소리는 수천 수만년을 이어오는 동안 다소 박동이 깨지고 리듬을 잃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건강한 숨결을 자랑하고 있다.

 

충북 보은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해 충주시 탄금대 합수지점까지 총연장 125km를 굽이치며 흐르는 달래강(달천). 우리나라 중부권의 중요한 수원(水源)이자 젖줄인 남한강의 한 지류로서, 충북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삶의 터전으로서 고고한 물흐름은 계속되고 있고, 그 고고한 삼백리 물길 곳곳에는 예나 지금이나 고유의 숨결들이 살아 꿈틀대고 있다.

 

 

 

 

 

 

 

 

 

 

 

 

 

 

 

 

 

 

 

 

 

 

 

 

 

 

 

달래강의 숨결들./자연닷컴

 

달래강은 우선 지역민들의 소망을 안고 흐르고 있다. 크고 작은 물줄기 마다에는 어김없이 마을이 자리하고 있고 그 어귀엔 으레 서낭당이 모셔져 있다. 가는 곳마다 느티나무,팽나무,소나무 같은 신목(神木)들이 금줄이 쳐진 채 한 두 그루쯤은 예사로 서있고 그 옆엔 돌무더기나 입석(立石),장승,당집 등이 역시 오색 헝겊을 두른 채 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각종 동제(洞祭)가 동고사,서낭제,장승제,산신제 등의 형태로 여전히 치러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증표다. 각 마을마다 전해내려오는 방식과 절차는 조금씩 다를지언정 그 목적은 한결같이 마을수호와 액운퇴치,소원성취가 주를 이룬다. 동제의 규모는 예전에 비해 많이 축소되긴 했으나 마을 주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체로서 이 지역의 오랜 풍습이자 순수한 삶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달래강은 또 수많은 이야기(설화)를 안고 흐른다. 가는 곳마다 세월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숱한 지명 유래와 인물·유적 관련 이야기들이 인근 주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뿌리 박은 채 전설 혹은 민담 형태로 목소리를 토해낸다. 최상류 발원샘에서부터 최하류 탄금대까지, 발을 딛는 곳마다 멈춰 서는 곳마다 할 얘기도 많고 들을 얘기도 많다. 오죽하면 달래강 명칭 유래에 얽힌 이야기만도 ‘정설’이 없을 만큼 갖가지요 물줄기가 지나는 곳마다 속리천,박대천,청천천,가무내,괴강,달천과 같이 부르는 이름이 각기 달라지는 강이 곧 달래강이다. 


달래강 지역엔 많은 세시풍속도 전해진다. 정월 초엔 세배와 덕담나누기,윷놀이를 하고 대보름엔 부스럼깨물기와 더위팔기,오곡찰밥 제사지내기,각종 풍물놀이 등을 하고 음력 이월엔 좀생이날 행사와 영등제를 통해 풍년농사를 기원한다. 또 삼월 삼짇날엔 산멕이를 통해, 사월 초파일엔 각자 절을 찾아 정성껏 치성을 드린다. 오월 단오날엔 마을단위로 놀이굿판을 열고 칠월 칠석엔 정한수 한 그릇에 무병장수를 기원 한 후 백중날엔 호미씻이를 통해 일꾼들의 노고를 위로한다. 팔월 한가위엔 조상 찾아 성묘하고 시월 상달엔 안택굿과 시제를 통해 천지 조상께 감사하며 동짓날엔 팥죽을 쑤워 먹고 섣달 그믐날엔 촛불을 밝혀 잡귀를 몰아낸다.


지금은 이같은 세시풍속들이 많이 쇠퇴했지만 최근 다시 열리고 있는 괴산 청천의 대보름날 행사와 불정의 백중놀이 행사는 달래강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달래강은 또 역사의 현장이다. 괴산군 청천면 후영리 농소마을의 고인돌과 칠성면 도정리의 고인돌 등 선사시대 유적을 비롯해 괴산읍 검승·제월리,  감물면 지장·창산·이담리, 충주시 이류면 문주리 등 곳곳에 남아있는 고려·조선시대 유적들 역시 달래강 사람들의 옛 숨결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달래강은 또 많은 생명체들을 보듬고 흐르고 있다. 수계 대부분이 산간지역을 흐르는 계곡형의 하천이기에 다른 수계에 비해 수질이 맑고 깨끗한 데다 주변 환경 또한 쾌적해 수많은 생명체들이 뿌리를 내리고 사는 ‘윤택한 삶의 보금자리’로서 독특한 생태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다.
 

 

 

 

 

 

 

 

 

 

 

 

 

 

 

 

 

 

 

 

 

 

 

 

 

 

 

 

 

■‘상생의 해’를 떠올리자

 

달래강의 서쪽 분수령인 한남금북정맥에 해가 기울고 있다. 지난 1월초 사전 취재에 들어간 지 꼭 12개월 만에 처음으로 ‘지는 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간 삼백리 물길을 답사하면서 전혀 느껴보지 못한 석양이다.


발걸음이 무겁다. 감히 1년간의 발걸음으로, 삼백리 물길에 담긴 모든 숨결을 지면에 담고자 했던 취재팀의 당초 욕심이 문득 떠오른다. 아쉬움이 크다. 그래서 미련이 남는다.


하지만 달래강의 해는 결코 지는 해가 아니다. 떠오르는 해다. 그만큼 달래강의 숨결은 건강하다.


또 하나 분명한 게 있다. 달래강엔 마침표가 없다. 남한강과의 합수지점인 탄금대가 달래강의 종착점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니다. 시작점이다. 남한강이라는 새로운 물흐름의 시작인 것이다.


그 옛날 서해를 출발한 소금배가 한강과 남한강을 거친 후 탄금대 옆을 지나 목도나루(괴산군 불정)를 향해 새로운 출발을 했듯이 또 하나의 시작점이 바로 달래강의 종착지다.


달래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다. 충북의 젖줄이자 지역민들의 삶의 터전이다. 그 안에 지역의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고 지역민들의 어릴적 추억과 꿈, 삶의 향기가 고스란히 배 있다. 또 그 품 안에는 각종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이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고 곳곳에 아름다운 절경과 명소가 깃들어 있다.

 

이러한 달래강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이 시대에 남겨진 숙제를 과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그건 단 하나 ‘달래강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숨결의 소중함을 지역민 스스로 지켜 나가면 된다. 달래강이 단지 지역발전을 위한 ‘개발의 대상’이 아닌, ‘상생의 대상’으로서 마지막 보루가 돼야 한다.


달래강은 어느 한 지자체, 어느 한 지역의 소유물이 아니다. 유역내 각 골짜기서 흘러내린 크고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들어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유기체인 달래강을 이루고 있듯이 유역내 구성원들이 스스로 힘과 뜻을 합쳐 지키고 가꿔나갈 때만이 소중한 자원으로서의 달래강이 보전될 수 있는 것이다.


달래강은 흐르고 있다. <끝>

 강을 사이에 두고 무릉리와 도원리 나란히 위치
 
가뭄 끝 장마로 하천·농경지 일시에 해갈 
 청천 뒤뜰숲 피서지로 각광 지역의 랜드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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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화9경의 마지막 명소인 박대소에서 몸을 풀어헤친 강물이 갑자기 거센 몸부림을 친다. 하룻 밤새 몸집도 수십 배 늘고 물빛도 온통 황톳빛으로 변했다. 7호 태풍 ‘갈매기’가 몰고온 집중호우 때문이다.

 

지난 6월 중순 단 한 차례 비다운 비가 내렸을 뿐 예년에 없던 마른 장마로 겨울철부터 내내 바닥을 드러내던 달래강이 하늘의 조화(造化)로 금새 딴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이 자연의 힘이다.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어쩔 수 없던 긴 가뭄이 자연의 조화로 일시에 해결된 것이다. 해서 달래강 주변 사람들은 이제서야 맘을 놓게됐다.

 

‘큰물’이 지나가지 않아 다슬기와 물고기들이 씨 마를까 걱정하던 어부들도, 연일 타들어가던 농작물을 바라보며 “며칠새 해갈되지 않으면 알갱이가 영글지 않아 곡식 먹긴 다 글렀다”고 애간장 녹이던 농부들도, 숲속까지 메말라 올해도 버섯포자 생기긴 다글렀다고 지레 한숨짓던 송이버섯꾼들도 이젠 모두 두 다리 뻗고 잠자게 됐다. 아니 오히려 국지성 호우가 더 내린다는 예보에 장마 걱정까지 하게 됐으니 하룻밤새 인간의 마음까지 간사하게 만들어 놓았다.

 

소리까지 요란해진 강물을 따라 박대소 계곡을 나오니 청원군의 끝동네인 쇠바우와 마주친다. 이 마을 앞에 새로 건설된 삼인교 중간이 청원군과 괴산군의 경계다.

 

다리가 없던 시절 마을주민들은 불편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고 한다. 강 건너 괴산군쪽 마을인 삼인리 사람들이 청원군 지역에 있는 논밭으로 일을 하러 왔다가도 속리산쪽 하늘에 검은 구름만 비치기만 하면 부랴부랴 강을 건너야 했단다. 그렇지 않고 우물쭈물 일욕심을 더 냈다간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 발이 묶여 물이 줄 때까지 마냥 생고생을 했단다. 속리산 지역이 워낙 비가 많은 다우지역이라 이 쪽의 ‘동네 날씨’ 갖고는 상류쪽 강우량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번에 불어난 강물도 속리산 쪽의 영향이 크다는 주민들의 말을 듣고는 다리를 건너 괴산군 청천면 관내로 들어서니 왼쪽으로 한들보가 눈에 들어온다. 청천~용화간 도로가 지나는 강평교 다리 위에서 한들보를 바라보니 이제껏 봐온 다른 보와는 규모가 비교 안 될 만큼 커 보인다. 청천지역에서 가장 넓은 들판을 끼고 있어 한들보라고 했다는 데 그 유래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들보를 넘어선 강물은 또 다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 이름이 청천지역을 흐른다 해서 붙여진 ‘청천천’이다. 본래 청천면은 조금전 지나온 삼인교 중간 경계지점부터 시작되나 청천 사람들의 관습상 한들보 바로 아래부터를 청천천이라 부르고 그 위를 박대천이라 부르고 있다.

 

불어난 물에 한들보에서 떨어지는 강물이 장관을 이룬다. 넓이 100m가 넘는 보막이에서 동시에 떨어져 한바탕 굽이친 후 하얀 포말을 만들며 몸을 사리는 모습이 마치 수문을 닫았다 연 것처럼 일사분란한 게 아주 볼 만하다.

 

모처럼만의 ‘큰물’, 그리고 장관
 태풍 ‘갈매기’가 몰고온 집중호우로 물이 불자 한들보에서 떨어지는 강물이 장관을 이룬다. 넓이 100m가 넘는 보막이에서 동시에 떨어져 한바탕 굽이친 후 하얀 포말을 만들며 몸을 사리는 모습이 아주 볼 만하다.

한참 넋을 잃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데 지나가던 사람들도 합세해 연신 ‘폰카’를 눌러댄다. 모두들 근래 보기 드문 광경이란다.

 

한들보 아래 귀만리로 들어서는 다리는 벌써 물이 목까지 찬 채 물위에 떠 있다. 다릿발은 아예 물에 잠겨 보이질 않는다.

 

이 다리 바로 아래 오른쪽으로는 속리산 뒤쪽(경북 용화)에서 흘러내려오는 신월천이 합수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강폭은 더 넓어지고 강물도 훨씬 많아졌다.

 

귀만리 앞 다리를 지나 한들(강평들)을 거친 강물은 청천면 소재지 인근으로 흘러들어 환경지킴이 공원 뒤 잠수교서 방향을 동북방향으로 약간 틀어 청천 뒤뜰숲(후평숲)을 스치며 질주한다. 환경지킴이 공원은 이 지역 주민들이 용화지역의 온천개발을 저지한 기념으로 세운 곳으로 달래강 수질과 자연환경을 지키려는 염원과 의지를 담고 있다.

 

청천 뒤뜰숲은 속리산 법주사 입구의 야영장숲(오리숲내 소나무숲)과 청원 미원의 금관숲과 더불어 ‘달래강 3대숲’이라 부를 만큼 명성이 자자한 청천지역의 명소다. 강가 옆으로 펼쳐진 모랫벌 위로 수십~수백년 된 참나무와 소나무, 느티나무들이 마치 하천가에 펼쳐놓은 파라솔처럼 즐비하게 서있는 모습은 이 지역을 찾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대표적인 랜드마크다.

 

불과 10년전까지만 해도 여름 휴가철이면 멋진 경관과 자연숲이 선사하는 시원한 바람, 강수욕, 여울낚시 등을 즐기기 위해 하루평균 수백~수천명이 찾아왔으나 국가 금융위기 이후 찾아온 장기적인 경기 침체 여파로 지금은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다.

달래강과 청천 뒤뜰숲
 청천 뒤뜰숲은 속리산 법주사 입구의 야영장숲(오리숲내 소나무숲)과 청원 미원의 금관숲과 더불어 ‘달래강 3대숲’이라 부를 만큼 명성이 자자한 청천지역의 명소다.

청천 뒤뜰숲을 반바퀴 돌며 섬 아닌 섬을 만들어놓은 강물은 이내 방향을 다시 틀어 고성리 고연마을을 향해 줄달음 친다. 청천뒤뜰에서 고연마을까지는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닫지 않는 계곡형 하천으로서 바닥에는 커다란 바위가 수없이 깔려있어 쏘가리,뱀장어,대농갱이 같은 경제성 어종이 많이 서식하나 워낙 인적이 드물어 불법어로가 성행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찻길을 통해 고연마을로 접어드는데 천변에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누런 암소가 평화롭게 되새김을 하면서 낯선 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비가 갠 틈을 타 동네주민이 매놓은 것이다.

고향의 풍경
 청천 뒤뜰숲을 지나 계곡이 휘도는 고연마을로 접어드는데 천변에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누런 암소가 평화롭게 되새김을 하면서 낯선 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고연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물머리를 튼 강물은 고성리 성암 못미쳐 도로변에 커다란 자연보를 형성해 놓은 후 다시 방향을 틀어 도원리를 향한다. 도원리 건너편 신도원은 청안 부흥쪽에서 흘러내리는 압항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이 일대의 금평·신도원·도원(원도원)리 하천변에는 최근 팬션과 민박집이 크게 늘어 이 지역의 새로운 수입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압항천이 청천천(달래강)으로 흘러드는 신도원리(중리) 합류지점에는 인근 무릉리에서 내려오는 조그만 실개천도 함께 합쳐지는데 그 물빛 만큼이나 동네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강 건너는 도원(원도원)이요, 합수머리가 있는 곳은 신도원, 실개천이 흘러내려오는 곳은 무릉이다. 이들 이름을 합쳐보면 ‘무릉도원’ 아닌가.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도원경처럼 끝없이 너른 땅과 기름진 논밭, 풍요로운 마을과 뽕나무, 대나무밭은 비록 없더라도 청천천과 인근 산들이 어우러진 이곳 산천경계가 결코 그에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 지역 선인들의 혜안을 읽을 수 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무릉리 안쪽에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자연을 벗삼아 사는 한 남자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행방을 모른단다. 외지서 들어왔다는 그도 처음에는 이곳 지명을 듣고 나름대로의 ‘이상향’을 꿈꾸며 들어와 그렇게 살다 바람처럼 어디론가 또 다른 도원경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장마철 이색 낚시
 비가 내려 달래강에 큰물이 흘러가면 각 다리나 천변에는 상류로 이동하는 눈동자개,메기,뱀장어 등을 잡으려는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이색적인 광경을 연출한다.

“용과 신선이 살던 옥화9경 곳곳에 펼쳐져”
선비들 즐겨 찾던 옥화대 옛 정취 솔~솔
‘죽은 하천’으로 변한 박대소 아쉬움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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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신선이 살던 곳 옥화9경. 청주-보은간 19번 국도가 지나는 청원군 미원면 운암리 삼거리서 왼쪽으로 박대천(달래강)을 끼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이 지역 안내표지판의 대표적인 수식어다.


달래강 삼백리 물길 중 유독 이 지역서 용과 신선이 강조되고 있음은 이곳의 경치가 예부터 예사롭지 않았음을 전설로 말해준다. 국내 절경 치고 용과 신선 이야기를 품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2경인 용소에서 그 옛날 승천하다 지나가던 여인이 보는 바람에 중도에 떨어져 이무기됐다는 ‘슬픈 용’의 전설을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3경인 천경대를 향하는데 물가에서 청소년 20여명이 기타 치며 흥겹게 놀고 있다. 1970~80년대나 볼 수 있었던 낯익은 광경이어서 눈길이 절로 머문다.

 

예년에 없던 마른장마가 이어지면서 때 이르게 찾아온 불볕더위로 한낮 기온이 섭씨 30도를 웃도는 데 그늘 하나 없이 달랑 돗자리 몇 개 깔고 앉아 노는 모습이 한편으론 안쓰럽게도 보였지만 자연과 어울어진 그들에게서 멋진 정열을 느낄 수 있었다.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 마을 안쪽 강변에 있는 천경대는 수직으로 이뤄진 절벽과 함께 달빛이 맑은 물에 투영돼 마치 하늘을 비추는 거울같다 하여  이름지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절벽앞 하천 수심이 얕아져 예전 풍취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옥화3경 ‘천경대’

 

마른장마로 장마철 때아닌 가뭄 현상이 이어지면서 달래강도 예년에 없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7월 둘째 주말을 맞아 강가를 찾은 피서객들이 강물엔 들어가지 않고 물가서 놀고 있다.


천경대서 하류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4경인 옥화대가 지척에 있다. 옥화대는 하천변 들판에 절벽과 고목이 어울어진 동산이 마치 옥처럼 떨어져 있다 해서 이름지어졌는데 이곳을 즐겨찾던 옛 선비들이 옥화9경 중 가장 대표적인 절경으로 꼽았던 곳이다. 특히 이곳은 조선시대 선비인 석애 이규소 등 유학자들이 후학을 양성키 위해 추월정과 만경정, 세심정 등 세 정자를 지어 후학을 양성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옥화대 정상부의 세심정에 올라 앉으니 주변 고목이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제멋대로 휘어진 아름드리 소나무와 느티나무, 참나무가 옛 향기 절로 피어나는 정자와 어울어진 게 어찌나 멋드러진 지 금방이라도 옛날 선비들의 시 읊던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한참을 그렇게 옛 향기에 취해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꾀꼬리가 날카로운 경계음으로 제 존재를 알린다. 유난히 부산을 떠는 모습을 보니 근처 어딘가에 둥지가 있는 모양이다. 빨리 자기들 행동권역에서 벗어나라는 경고인지라 더 지체할 수가 없어 발길을 막 돌리려는데 이번엔 옆에 있던 소나무 둥치 구멍서 느닷없이 솔부엉이가 튀어나온다. 잠을 자다가 이웃사촌 꾀꼬리 부부가 하도 시끄럽게 구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난 듯 하다.

 

생태계가 아직은 살아있음이다. 생물들이 살아갈 적당한 환경과 공간만 보전된다면 그들 역시 언제까지라도 우리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옥화대(옥화4경)의 세심정


반가운 손님을 뒤로 하고 발길은 다시 5경인 금봉을 향한다. 이곳은 이미 지난 3~4월에 세 차례 답사했던 곳으로 우거진 숲과 급경사, 높은 절벽 때문에 사진촬영이 결코 쉽지 않은 곳이다. 지난번 마지막 촬영 때 70~80도 절벽 위의 참나무에 간신히 올라앉아 수백 미터 아래로 굽이치는 물길을 촬영하다 갑자기 불어닥친 강풍으로 카메라를 떨어뜨릴 뻔 했던 생각에 아직도 등줄기가 찌릿하다.    

 

비단결 같은 봉우리란 뜻의 금봉(錦峰)은 달래강서 보기 드물게 물길이 오메가(Ω) 형으로 굽이치는 곳으로 커다란 바위 동산을 하천물이 한바탕 휘돌아 나가는 하천가에 깨끗하고 고운 백사장이 형성돼 있어 많은 이들이 찾던 명소다.

 

길 입구가 있는 미원면 월룡리서 금봉을 바라보고 산을 오르다 보면 어느 한 순간 2m 가량의 좁은 능선에서 동시에 양쪽 강물이 보이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오메가 형태의 목 부분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이뤄진 이곳 목 부분을 아래 위 동시에 한 장의 사진으로 나타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써봤지만 워낙 절벽이 높아 포기하고 말았다.

 

과거 언젠가는 서울의 모 기업서 이곳 목부분에 터널을 뚫어 거기서 생기는 낙차를 이용, 소형 발전소를 건설하려 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금강 유역에서는 이미 오래 전 전북 무주군 무주읍 방우리에 있는 오메가 형태의 물줄기에 터널을 뚫어 소수력발전소를 건설한 바 있다.

 금봉(옥화5경)에서 바라본 박대천(달래강)

 비단결 같은 봉우리란 뜻을 지닌 금봉(錦峰)은 달래강서 보기 드물게 물길이 오메가(Ω) 형으로 굽이치는 곳으로 커다란 바위 동산을 하천물이 한바탕 휘돌아 나가는 하천가에 고운 백사장이 형성돼 있어 많은 이들이 찾던 명소다


금봉을 돌면서 호쾌하게 몸부림 친 물줄기는 깊은 산골짜기를 빠져나오면서 곧바로 옥화6경인 금관숲(미원면 금관리)과 만난다. 금관숲은 청주 등 인근지역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야영장 형태의 자연숲이다. 약 7,000㎡의 넓은 숲에 20m가 넘는 굴참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한여름 피서지로 각광받고 있다.

 

금관숲에서 다시 미원면 계원리를 향해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 산자락으로 높이 6~10m, 넓이 약 50m 가량 되는 절벽이 펼쳐져 있는데 그 앞쪽에 7경인 가마소뿔이 있다. 이 가마소뿔은 독특한 이름 만큼이나 애잔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먼 옛날 막 혼례를 치른 신랑과 신부가 이곳을 지나는데 신부의 가마가 흔들려 그만 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를 애통해 하던 신랑도 함께 뛰어 들어 죽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어 나타나는 8경인 신선봉은 미원면 계원리서 바라보이는 강건너 신선봉의 경치를 말한다. 해발 630m인 이 봉우리는 먼 옛날 신선이 놀았다 하여 신선봉으로 불려지고 있다.

 

마지막 옥화9경인 박대소는 이 지역(청원 미원)의 달래강 이름인 박대천을 낳은 곳으로, 계원리서 쇠바우(어암1리) 쪽을 향해 물길을 따라내려 가다보면 깊은 계곡 안에 커다란 소(沼)가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박대소다. 푸른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깊은 못이 있어 박대소라 일컬어지는데 이곳 역시 하천 바닥이 많이 메워져 예전 느낌은 나지 않는다. 이 소는 특히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에 있어 불법어로꾼들이 자주 찾는 바람에 오래전부터 물고기와 다슬기가 자취를 감춘 ‘죽은 하천’으로 알려져 있다.

박대천 이름 낳은 박대소
옥화9경의 마지막 명소인 박대소는 청원 미원 지역의 달래강 이름인 박대천을 낳은 곳으로, 푸른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깊은 못이 있어 박대소라 일컬어지는데 이곳 역시 하천바닥이 많이 메워져 예전 느낌은 나지 않는다.
 

여울로 변한 뱃길 세월무상 절로 느껴져
80년 보은 대홍수로 마을마다 아픈 상처 
청원관내 접어들면서 박대천으로 불려져

 

상전변성해(桑田變成海), 즉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했던가.

 

속리천(달래강)을 따라 보은군 산외면 이식리로 접어든 나그네는 세월의 무상함에 발길을 멈춘다.

 

옛날 이곳을 지나던 배들이 쉬어갔다는 주식포(舟息浦)는 지금의 지명인 이식리(梨息里)로 변했고 마을앞 강물은 무릎도 채 안차는 얕은 여울로 변했으니 말 그대로 창해상전(滄海桑田)이요 능곡지변(陵谷之變:언덕과 골짜기가 서로 바뀜)임을 실감케 한다.


이식리에서 잠시 강물에 발을 담그고 사람의 인생살이와 강의 생로병사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잠겨있다 다시 이식2교를 건넌다.

 

물길은 이곳서 산외면과 내북면 경계를 지나 오른쪽 산자락을 끼고 또 한바탕 커다란 S자형을 그리며 호기를 부리는데 그 중간에 만나는 곳이 호룡소(虎龍沼)다. 산외면 이식리서 내북면 봉황리를 향해 이어진 바위산 자락이 마치 호랑이가 누워 눈을 감고 있고 능선에서는 용이 꿈틀거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그 밑을 감도는 물을 호룡소(虎龍沼)라 불렀는데 지금은 흔히 호롱소라 부르고 있다.

 

호롱소에서 호랑이 머리격인 바위 절벽 위 산봉우리는 전국에서 제일 가는 명당으로 알려진 곳인데 지금은 문화 류씨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호롱소 부근은 그 이름 만큼이나 경치 또한 절경을 이뤄 외지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명당도, 명소도 이젠 모두 예전 일이 될 판이니 이곳서도 세월무상을 또 다시 느끼게 한다.

 

최근 진행중인 내북-운암간 도로 공사로 곧 터널이 뚫릴 예정이어서 주변 자연경관이 크게 훼손될 위기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터널과 교량이 지나는 곳이 하필이면 호랑이 머리부분과 호롱소 주변이어서 인근 주민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위기의 호룡소
호랑이와 용의 형상을 한 바위산 밑으로 강물이 휘돈다 하여 이름 붙여진 호룡소는 인근 도로공사로 인해 자연경관이 크게 훼손될 위기에 놓여 있다. 한 주민이 호룡소의 내력을 설명하며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

 

강물마저 호롱소의 슬픈 사연을 아는 지 가냘픈 몸짓으로 호랑이 꼬리 부분의 산자락을 살짝 적시며 모래벌을 향한다.

 

봉황리의 중심마을인 모래벌은 이곳의 지형상 속리천이 휘돌아 흐르면서 곳곳에 모래톱을 만들어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수초로 가득 차 예전 모습과는 딴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마을 앞의 청벽산이 봉황리란 아름다운 지명과 유구한 마을 역사를 전하며 마을 상징으로 우뚝 솟아있다. 봉황리는 이곳 청벽산에 아주 오랜 옛날부터 봉황 한 쌍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됐다.


하천을 끼고 있는 속리천 유역의 마을 대부분이 지난 1980년도 보은 대홍수때 입은 수해로 뼈아픈 상처를 안고 있듯이 봉황리 모래벌 역시 당시 입은 수해로 마을 전체가 쑥대밭으로 변해 집을 다시 짓고 제방도 높이 쌓는 큰 변화를 겪었다. 현재 마을앞을 지키고 서 있는 느티나무도 당시 제방을 높이면서 밑둥치가 2m 이상 덮여져 높이가 오히려 줄어든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봉황리 모래벌 앞에는 봉황교가 세워져 있고 이 다리 남쪽으로는 달래강의 1차 지류(총 17개) 중 처음으로 만나는 흑천이 흘러든다.

 

흑천은 한남금북정맥이 지나는 보은군 내북면 법주리서 시작해 염둔·화전리를 거쳐 창리에서 동산·도원리쪽 물길과 합쳐진 후 봉황교 부근서 속리천과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흑천 합류부 지점 도로변엔 '속리산 24km'란 표지판이 서있어 이곳이 달래강 3백리 물길을 따라 발원지로부터 하류쪽으로 대략 5분의 1가량 지난 지점임을 알려주고 있다.


모래벌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면서 마주치는 곳이 청주-보은간 19번 국도가 지나는 청벽산 절벽이다. 이 청벽산 절벽에는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특이한 자연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봉황리 마을의 숨겨진 자랑거리인 '홍두깨물'이다. 이 홍두깨물은 비가 많이 올 때만 청벽산 절벽의 중간 부분 바위틈에서 약 40m 아래로 쏟아지는 장대한 폭포로서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아주 희귀한 현상이다.

 

봉황리의 상징 청벽산
보은군 내북면 봉황리는 마을앞 청벽산에 봉황 한 쌍이 살았다고 하여 이름 지어졌는데 이곳 중턱에는 비가 많이 올때만 나타나는 '홍두깨물 현상'이 마을의 자랑거리로 전해진다
.

 

봉황리 모래벌앞 느티나무는 지난 1980년 보은 대홍수 이후 제방을 높이면서 밑둥치가 2m 이상 파묻힌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청벽산 아래 봉황보에 잠시 머물렀던 물길은 보를 넘으면서 보은군 경계를 벗어나 이내 청원군 관내로 접어드는데 바로 이때부터 속리천이란 이름 대신 '박대천'이란 새 이름으로 흐르게 된다.

 

박대천은 청원군 미원면 어암리에 있는 박대소(沼)의 이름을 딴 것으로 달래강이 괴산군 청천지역에서 청천천이란 이명을 갖기 전까지 불려지게 된다.


이름이 바뀌어서일까. 청원군 미원면 운암1리서 박대천으로 불려지기 시작한 달래강은 물흐름이 훨씬 느긋해졌다.

 

들판 가운데를 흐르는 물길을 따라 인풍정교를 지나 운암교에 올라 서니 왼쪽으로 또 하나의 물길이 합류하고 있다. 두번째 1차 지류인 감천이다. 감천은 청주시 상당산 부근서 시작해 낭성면 지역서 인경천(2차 지류)과 만난 후 다시 미원면 관내를 흐르는 미원천(2차 지류)과 몸을 섞어 운암교 아래서 박대천으로 흘러든다.

 

봉황보

 

인풍정교서 바라본 박대천

 
이곳 감천 합류지점부터는 옛날 용과 신선이 살았다는 옥화9경 지역이다. 옥화9경은 달래강 본류가 통과하는 4개 시.군(보은군, 청원군, 괴산군, 충주시 등으로 지류만 지나는 음성군은 제외) 가운데 가장 짧은 구간을 지나는 청원군 관내 9곳의 절경을 일컫는 바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청원군이 '청원 관광의 간판'으로 내세우는 명소다.


그 중 옥화 1경은 달래강 본류가 아닌 감천(청주-보은간 19번 국도변 운암리) 하류에 있는 청석굴로 이곳에서는 구석기인들의 생활흔적인 찍개와 볼록날, 긁개 등이 발견된 바 있으며 굴에서는 용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감천이 합류하는 운암교에서 하류로 약 1km 가량을 내려가면 옥화2경인 용소(龍沼)가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다.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에 있는 용소는 달래강 수계 중 수심이 가장 깊어 절벽위서 내려다 보면 바닥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물빛이 검푸른 게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이 용소에는 먼 옛날 용이 살았는데 그 용이 승천할 때 지나가던 여인네가 보는 바람에 부정을 타서 그대로 떨어져 이무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절벽 면에는 용이 승천할 당시 새겨진 듯한 용의 형상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달래강의 명소 '용소(옥화2경)'
용소에는 먼 옛날 이곳에 살던 용이 승천할 때 지나가던 여인네가 보는 바람에 부정을 타서 그대로 떨어져 이무기가 됐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절벽 면에는 용이 승천할 당시 새겨진 듯한 용의 형상이 뚜렷이 남아 있어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달래나 보지…" 슬픈 남매 사연 담은 설화 대표적
물맛 좋아 달천(甘川), 수달 많이 살아 수달천(獺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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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달천)은 사연이 참 많다. 특히 명칭 유래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와 기록이 전한다.

 

우선 충주를 중심으로 널리 알려진 달래강 설화부터 들어보자.


"먼 옛날 친남매가 길을 가다 소나기를 만났다. 때는 여름인지라 앞서가던 누나의 얇은 옷이 비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뒤따라가던 남동생은 어쩔 수 없이 누나의 드러난 몸을 보게�고, 순간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심성이 착했던 남동생은 자신이 엉뚱한 생각을 한 게 죄스러워 그만 돌로 아랫도리를 쳐 죽고 말았다.
한참 뒤 남동생이 따라 오지않는 것을 안 누나가 이상히 여겨 되돌아가보니 아뿔사, 동생이 아랫도리에 피를 흘리며 죽어있지 않은가. 이를 본 누나는 그제서야 전후사정을 알아채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하는 말이 '차라리 달래나 보지, 말이나 해 보지…' 그랬다는 것이다."


이같은 슬픈 얘기가 전해지면서 그때부터 달래강이란 이름이 생겼고 누나가 동생을 끌어안고 통곡한 곳은 달래고개라 불렀다 한다.

 

다음은 달천에 관한 유래다.


때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게 됐는데 이 때 이여송이 명군의 장수로 들어오게 됐다. 이여송의 아버지(이성량)는 본래 조선사람이었으나 철령위로 도망가 살았기에 이여송 역시 근본이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망각한 채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며 중요한 혈을 끊는 등 만행을 일삼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여송 휘하의 한 장수가 충주지역을 지나다 갈증이 나자 맑게 흐르는 강물을 마셨는데 그 물맛이 달고 좋아 감천(甘川)이라 한 것이 훗날 달천으로 변했다고 한다.


물맛이 달고 맛있다는 뜻의 또다른 이명으로는 단냇물, 달냇물 등이 있으며, 충주 인근의 달천동,단월동,단호사와 같이 '달' 혹은 '단'자가 들어간  지명은 한자어에 상관없이 모두 '단 물맛'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또 일설에는 동국여지승람에 달천(獺川)으로 표기돼 있는 점을 들어 본래 이 강에는 예부터 수달(獺)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수달내라는 뜻의 달천(獺川)으로 불리다가 후에 '달' 자가 채음돼 달래강(達川)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달래강 인근에서는 조선초부터 수달피가 진상됐다는 얘기가 전한다.


달천과 관련된 다른 기록으로는 이중한의 택리지에 '속리산 정상에서 동으로는 낙동강, 서로는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며 북으로는 충주의 달천(達川)이 되어 한강으로 흘러든다'고 적혀있다. 또 조선시대 동람도에는 충주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산천,덕천,달천(獺川)으로 각각 표기하고 있어 당시에도 달천이란 이름과 함께 여러 명칭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덕을 입은 강, 즉 덕천(德川)이란 이명도 전한다. 조선시대 벌미란 마을의 한 사내가 자신의 집으로 탁발 온 스님의 권유에 따라 달천에 징검다리를 놓았는데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병자(病者)가 다리 덕에 목숨을 건지게 되자 그 병자를 업고왔던 노인이 '과연 덕을 입은 강이로구나(於是 彼德之川也)' 한 것이 전해져 덕천이란 이름이 생겼다 한다.

 

달래강은 지금도 지역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최상류인 보은 속리산지역에선 속리천, 청원 금관~어암리 부근에선 박대천, 괴산 청천부근에선 청천강 혹은 가무내(현천), 괴산읍 부근에선 괴강(槐江) 등으로 불리다가 충주시 달천동에 이르러서야 달래강이 된다.


속리천은 발원지인 속리산에서 이름을 따왔고 박대천은 인근 어암리(충북 청원군 미원면)의 박대소(沼)에서 유래됐으며, 청천강은 괴산 청천지역을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청천지역, 특히 화양동 부근에서 불리는 가무내는 '검은 내(현천.玄川)'란 뜻으로 인근 강바닥이 검은 바위와 돌로 돼 있어 물이 검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괴강은 괴산지역 주민들이 특히 달래강을 대신해 부르는 이름으로 괴산(槐山)의 '괴(槐)' 자를 따왔다.

 

 

�달래강의 다른 이름 '박대천'
달래강은 지금도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최상류인 속리산 부근에선 속리천, 청원 미원 부근에선 박대천, 괴산 청천부근에선 청천강 혹은 가무내(현천), 괴산읍 부근에선 괴강(槐江) 등으로 불린다.

< 청천천의 겨울>

 

 <가무내(현천)의 봄 전경>

 

<속리천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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