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망 안에서 '평화로운 자연'을 보다

 

 

멧돼지에게 또 한번 된통 놀랐다.

지난 5월 8일 '계곡의 잠수부' 물까마귀의 육추(새끼 기르기) 과정을 촬영하기 위해 보은의 어느 계곡에 들어가 잠복하고 있을 때였다. 새둥지 근처에 카메라를 설치한 뒤 위장망을 푹 뒤집어쓴 채 숨죽이고 있는데 뒤쪽 절벽위에서 갑자기 돌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심상치 않아 뒤돌아보고 싶었으나 그때 마침 물까마귀 어미 1마리가 먹이를 물고 나타나기에 계속 셔터에만 신경썼다. 그러길 5분여. 뒤에서 소리가 난 일은 잊은 채 서너 컷을 더 찍고 나서 사진상태를 확인하고 있는데 이번엔 등뒤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2m 앞으로 송아지만한 멧돼지 1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숨이 멎었다. 야생 멧돼지와 직접 맞닥뜨린 급박한 상황이니 머리카락이 있는 대로 쭈뼛 섰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에 비친 멧돼지표정이 의외로 태연했다. 나를 보지 못한 것이다. 그게 문제였다.
다행이다 싶은 순간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해댄 것이다. "흐~흠!" 갑자기 사람소리가 나자 멧돼지 행동이 걸작이었다. 마치 자갈밭에서 산악오토바이가 전속력으로 스타트하듯 꽥! 소리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다. 야생 멧돼지가 빠르다고는 하나 그처럼 비호같은 줄은 미처 몰랐다.

위장망이라고 해봤자 가는어망에 먼지털이같은 술을 듬성듬성 달았을 뿐인데 그 효과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2개의 바위 틈새에 위장망을 치고는 죽은 듯 들어앉아 있는 나를 눈치채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해서 느긋하게 지나던 중인데 돌연 이상한 물체안에서 뜬금없이 인기척이 들리니 멧돼지인들 기겁할 수밖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건 나였는데 되레 헛기침 한번에 똥줄 빠지게 달아나는 멧돼지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평화로운 외출을 방해한 게 미안하기도 했으나 커다란 몸집이 까무러치듯 달아나는 품새에 도저히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날 마주친 것은 멧돼지 뿐만이 아니었다. 다람쥐 1마리는 위장망안으로 기어들어 내 장화 위에 잠시 올라섰다가는 느낌이 이상했던지 이내 달아났고 족제비 1마리는 위장망을 걸쳐놓은 한쪽 바위밑을 지나다가 한참을 서서 혀로 몸치장하고는 태연스럽게 사라졌다. 살아있는 야생 족제비를 바로 눈앞에 두고 쳐다보기는 난생 처음이어서 그저 신기한 마음에 꼼짝 않느라 사진 찍는 걸 그만 깜빡 잊었다. 그밖에도 앙증맞은 굴뚝새와 노랑할미새 등 많은 새들이 다가왔다가는 사라졌다.


위장망안에서 바라본 자연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그것이 비록 겉으로 보이는 평화일망정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동물들이 아직 상당수 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이 됐다.
위장망안에서의 시간은 또 많은 것을 생각케 했다. 위장망을 쓰지 않고서라도 인간이 아무때나 그들 자연과 함께 허울없이 지낼 수는 없을까. 공상 같지만 과연 그것이 불가능한 일일까.


또 이번 촬영을 통해 물까마귀의 특별한 자식사랑을 확인하게 됐다. 물바깥에서 먹잇감을 잡는 것도 어려울 텐데 매번 물속에 들어가 헤엄치면서 먹이를 잡아다 새끼들에게 먹이니 그보다 더한 부모의 정이 어디 있는가. 쉬지 않고 먹이를 물어다줘도 곧장 배고프다고 보채는 새끼들이 그저 안쓰러운 양 더욱더 열심히 잠수질에 나섰던 물까마귀 어미들. 해가 어둑어둑해서야 고된 날갯죽지를 추스르며 서로를 위로하던 그들 부부를 바라보면서 문득 내 어깨에 짊어진 불효의 짐이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어버이날이었던 그날, 물까마귀에게서 부모의 숭고한 내리사랑을 다시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잊지못할 하루였다.

새들의 울음소리엔 사연이 있다

 
 “제집 죽고 자석 죽고 서답빨래 누가 할꼬.”

    얼핏 들으면 징글히도 박복한 어느 홀아비의 신세타령처럼 들리겠지만 엉뚱하게도 경남지역 사람들이  멧비둘기 울음소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구구~ 에에~” 울어대는 소리가 마치 “마누라 죽고 자식도 죽었으니 속옷빨래는 누가 할꼬”라며  한탄하는 것으로 나타낸 것이다.
  우리 민간설화에는 또 소쩍새 울음소리와 관련한 다음의 이야기가 전한다. 먼 옛날 지독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밥주기가 아까워 아주 작은 솥으로 밥을 짓게 했는데 결국 밥을 지어도 먹을 것이 없게 된 며느리는 굶어죽었고 그 불쌍한 넋이 소쩍새가 되어 밤마다 솥이 적다고 한탄하게 된 것이 소쩍새 울음소리란 것이다. 또 옛 어른들은 소쩍새가 “소탱 소탱”하고 울면 솥이 텅텅 빌 정도로 흉년이 들고 “솟쩍다 솟쩍다”하고 울면 솥이 적을 정도로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새는 비록 같은 종일지라도 계절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소리를 낸다. 게다가 일부 새는 지역에 따라 높낮이가 다른 사투리까지 쓴다. 그러니 같은 종의 새소리라도 듣는 사람에 따라 달리 들을 수 있고 표현 역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국내에 나와있는 조류관련 서적 대부분도 각 종의 울음소리가 제각각 표현돼 있다.
 세계적 멸종위기종 크낙새도 이같은 울음소리의 ‘제각각 해석’으로부터 명칭이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1800년대 후반 유럽인들이 대마도와 한반도에서 이름모를 새를 채집, 런던 동물학 잡지에 첫 발표하면서 이 새의 울음소리를 ‘클락(Clark)’으로 표현함으로써 훗날 크낙새로 불리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내학자들은 이 새의 울음소리를 ‘끼이약 끼이약’ 혹은 ‘클락 콜락’으로 표현하고 있다.

 새소리는 조류연구가들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종을 구분하거나 암수를 구별할 때 또는 둥지를 찾을 때 단서가 되는 것이 새소리이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도 생태사진을 찍기 위해 새를 찾아 나설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새소리다. 딱따구리류의 드러밍(Drumming)을 비롯해 일반적인 새들이 번식기에 내는 Song과 그외의 울음소리인 Call을 구분할 줄 알게 된 것도 바로 그들의 ‘소리’에 귀기울인 경험 덕분이다.

 어제는 그러한 경험 덕을 톡톡히 봤다. 지난 3월 중순 둥지 짓는 것을 처음 발견한 이후 4월 내내 관찰해 오던 물까마귀 둥지가 어느날 졸지에 빈 둥지가 된 것을 보고는 크게 상심했었는데 바로 어제, 괴산 선유동서 알 품는 물까마귀 둥지를 새로 찾아낸 것이다. 몇년 전 그 곳서 한 쌍을 목격한 일이 생각 나 혹시나 하고 찾아갔더니 기다렸다는 듯 “찌이 찌이” 독특한 소릴 내는 게 아닌가. 직감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바위 뒤쪽을 살펴보니 영락없이 이끼로 지어진 둥지가 매달려 있고 그 안엔 어미새 1마리가 들어앉아 목하 새생명을 탄생시키느라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나 반갑던지 가슴이 쿵쾅거렸다.

 한데 그날은 가슴 아픈 일도 겪었다. 돌아오는 길에 보름전 찾아놓은 원앙 둥지가 궁금해 들렀더니만 아뿔싸! 30개가 넘는 알이 몽땅 사라졌다. 인근 주민에게 물으니 사람 소행이란다. 처절한 마음으로 이번엔 강변의 꼬마물떼새 둥지를 찾았다. 역시나였다. 알 4개가 사람 발길에 무참히 밟혀 깨져 있었다. 기가 막혔다.

 가장 숭고한 대내림의 임무를 위해 자연계에선 일생일대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것을 보듬어야 할 인간계에선 무자비한 일들을 서슴지 않고 있다. Song을 부르던 새들이 사람만 만나면 갑자기 경계음(Call)을 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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