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수달가족
야생동물의 흔적을 찾아내고는 심장이 뛸 만큼 반가워한 적이 있다. '위기의 야생'을 취재하던 지난해 겨울 얘기다.
엄동설한에 달래강변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니는데 상류 쪽 어느 지점에 이르자 얼음판 위로 심상찮은 발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길게 이어진 발자국 사이 사이로 마치 사람이 붓을 끌고 다닌 것 같은 꼬리 흔적까지 나 있는 것으로 보아 그토록 찾으러 다녔던 수달임이 틀림 없었다. 가슴이 뛰었다.
더욱 흥분한 것은 크기가 다른 여러 개의 발자국과 배설물, 먹이 흔적, 영역 표시 등 보다 확실한 흔적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곧바로 추적에 들어갔다. 주요 이동 노선과 먹이 장소, 배설 장소, 텃세 표시를 위해 몸을 비벼대는 장소 등을 꼼꼼히 살펴본 뒤 물가에서 산으로 이어진 발자국을 따라갔다. 여러 개의 발자국은 어느 한 급경사면의 바위굴 앞에서 동시에 사라졌다. 굴 입구를 들여다 보니 반들반들했다. 보금자리까지 찾아낸 것이다.
촬영은 이튿날부터 시작됐다. 우선 동굴에는 몇 마리가 사는지, 어느 지점을 통해 물가로 이동하는지, 잡은 먹잇감은 어떻게 먹고 얼음판 위에서는 어떤 행동을 하는지 등을 기록하기 위해 촬영장소를 강 건너편에 잡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첫째 날도 둘째 날도 수달은 나타나지 않았다. 수달은 보통 해가 떨어질 무렵에 보금자리를 나서는데 연 이틀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름대로 은폐한답시고 위장망까지 동원했는데도 눈치를 챘던 모양이다.
너무 깔본 탓이다. 해서 장기전으로 갔다. 면도날 같은 강바람이 연일 몰아쳤지만 한 번 시작한 일 수달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 보자는 식으로 무작정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매복했다. 그러길 일주일여. 수달들도 지쳤는지 아니면 '저 이상한 존재'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님을 알았는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수달가족은 셋이었다. 큰 개 만한 어미 둘에 1년생으로 보이는 새끼 한 마리가 가족을 이뤄 살고 있었다. 촬영 시작 보름쯤 돼서는 카메라 앞까지 다가와 두리번거리는 대범함도 보였다. 그만큼 친해졌다.
그로부터 4개월뒤, 수달가족의 여름나기는 어떠한지가 궁금해 다시 그 자리를 찾았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수달가족이 보이질 않았다. 물가 바위 위에 그많던 배설물도 오래된 것 외에는 보이질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예감이 좋질 않아 보금자리를 가봤다. 아뿔싸, 바위굴 앞에 서있던 나무들은 온데간데 없고 웬 뜬금없는 토종벌통 3개가 문지기처럼 서있었다. 굴 안을 들여다 보니 썰렁한 채 풀까지 자라나 있었다. 기가 막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또 그로부터 일년여가 지난 엊그제(2010년 12월 24일), 수달가족도 보고 싶고 또 미련도 남아 있어 혹시나 하고 다시 그 자리를 찾았다. 역시나였다. 흥분에 들뜨게 했던 발자국도, 먹다만 물고기뼈와 비늘도, 배설물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나 놀랐으면 일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되돌아오지 않을까. 얼마나 두려웠으면 인근에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멀찌감치 달아났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3마리가 동시에 굴밖으로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뒤뚱뒤뚱하면서 물속으로 뛰어들던 귀여운 수달가족. 팔뚝만한 잉어를 잡아서는 자랑스러운 전리품인 양 한참을 가지고 놀다가 어느 한 순간에 우둑우둑 씹어먹던 '먹보' 수달가족. 얼음판 위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썰매를 타듯 미끄러지며 정답게 장난치던 개구쟁이 수달가족….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서려는데 문득 소름끼치는 불길함이 스쳤다. "혹시 벌통이 놓이던 그 때 수달가족이 아예 싹쓸이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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