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개 자생지 4,300여 그루 새로 찾아내

달래강 수계엔 12개 자생지 2,700그루 분포
속리산에서 수령 5백년 최고령수 발견 '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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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달천)은 한 마디로 ‘망개나무의 강’이다. 그만큼 망개나무는 달래강을 대표하는 식물이다.

 

망개나무(Berchemia berchemiaefolia)는 갈매나무과의 낙엽큰키나무로 우리나라 중부지역과 일본 남부지역, 중국 중부지역에 극소수가 분포하는 세계적인 희귀수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월악산과 속리산, 주흘산, 주왕산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독특한 분포도를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달래강의 발원지인 속리산 지역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급경사를 이룬 바위지대를 유난히 선호하는 데다 까다로운 발아조건으로 자연번식이 잘 안돼 점차 개체수가 줄고 있기 때문에 보은 속리산 탈골암 부근의 노거수(약 300년)와 제천 송계리의 노거수(약 150년), 괴산 사담리의 자생지를 각각 천연기념물 207호와 337호, 266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으며 종 자체는 환경부의 멸종위기야생동식물(Ⅱ급)로 지정돼 있다.
 
■‘4천3백여 그루’ 최초 확인 

 

그동안 학계에는 ‘망개나무가 타지역 보다는 속리산 지역에 주로 분포한다’고만 알려져 왔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망개나무가 속리산 계곡서 처음 발견된 이래 수 차례 학술조사가 이뤄졌지만 매번 단편적인 조사에 그쳐 아직까지 구체적인 개체수가 밝혀지지 않은 채 막연히 ‘추정’에만 의존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속리산 지역에는 얼마 만큼의 망개나무가 자생하고 있을까. 취재팀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보다 근접한 해답을 얻기 위해 20여년의 망개나무 연구경력이 있는 한국자연공원협회 박경수이사(75)와 함께 지난 5월초부터 7월말까지 약 3개월간 현지 조사를 벌였다.

 

 

수령 500년쯤으로 추정되는 ‘최고령 망개나무’.

번 취재에서는 속리산 계곡에서 국내 최대이자 최고령수의 망개나무 1그루가 발견돼 화제를 모았다.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는 개체들은 수령이 이보다 훨씬 낮다. 동행취재자인 박경수 한국자연공원협회 이사가 최고령 망개나무를 안아 보이고 있다./자연닷컴 

그 결과 지난 6월 중순에는 속리산 골짜기(상환암 위쪽 신은폭동 너머 계곡)서 수령 약 500년으로 추정되는 국내 최대이자 최고령수의 망개나무 1그루를 발견(충청타임즈 2008년 6월 26일자 보도)한 것 외에도 총 17곳의 자생지와 4,300여 그루의 망개나무를 새롭게 찾아냈다.

이같은 숫자는 그간 ‘멸종위기’에 처한 것으로 여겨져 온 망개나무의 위상을 다시 한번 고찰케 하는 새로운 결과로서 유전자원 보전측면과 학계에 던지는 의미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발견된 자생지별 개체수는 속리산 동남쪽 사면인 대목골 600그루, 만수계곡 600그루, 서원계곡 600그루, 구병산 100그루, 장각계곡 100그루,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 100그루, 서북쪽 사면인 속리유스타운 계곡(일명 새미기골,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0그루, 야영장 계곡(일명 아우내미골,〃) 100그루, 쉰동굴 계곡(〃) 100그루, 중판리 속리터널 입구(보은군 속리산면) 60그루, 하판리 문화마을 뒷산(〃) 500그루, 신정리(〃 산외면) 100그루, 대원리(〃 〃) 400그루, 화양계곡(괴산군 청천면) 150그루 등이다.

이들 자생지 가운데 속리유스타운 계곡과 야영장 계곡, 쉰동굴계곡, 중판리, 하판리, 신정리, 대원리, 화양계곡 등 8곳의 자생지는 모두 속리산 자락의 달래강 수계내에 위치해 있다. 

취재팀은 또 이외에도 속리산 국립공원 지역인 괴산군 칠성면 갈은구곡(일명 갈론계곡)과 인근 아가봉 자락에서 400그루, 괴산호 주변 군자산 자락과 천장봉 자락에서 각각 150그루와 50그루의 망개나무를 발견했다. 이들 자생지 역시 속리산과 연결되거나 인접한 산줄기로서 모두 달래강 수계를 이룬다.

자생지별 개체수는 취재팀이 최소한의 개체수를 대략적으로 계산한 것으로 이미 1979년 발견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괴산 사담리 자생지의 475그루(문화재청 2005년 조사)는 제외된 숫자다.

따라서 속리산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 망개나무는 사담리 자생지를 포함해 모두 18개 자생지에 약 4,800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이 가운데 12개 자생지의 약 2,700그루가 달래강 수계내에 분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나머지 6개 자생지의 2,100여 그루는 속리산 동남쪽의 낙동강과 금강 수계내에 분포하고 있다. 

이번 취재에서는 또 비교적 수령이 오래된 개체인 약 350년생 2그루가 속리산 법주사 매표소 위쪽 산자락서 발견돼 관심을 끌었다.

 

 

새롭게 찾아진 ‘신정리 자생지(보은군 산외면)’. 곳곳에 이파리가 좀 더 짙은 초록빛을 띠는 나무들이 망개나무이다./자연닷컴

동행 취재에 나섰던 박경수 이사는 “조사 기간이 워낙 짧아 개체수를 세밀히 파악하지 못해 아쉽다”며 “추후 정밀조사를 실시할 경우 이번에 확인된 개체수보다 훨씬 많은 망개나무가 찾아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박 이사는 “그러나 기존 자생지 외에 무려 17개나 되는 새로운 자생지를 찾아낸 것과 속리산서 약 500년생의 최고령수를 찾아낸 것은 이번 조사의 가장 큰 수확”이라며 “특히 이번에 찾아진 최고령수는 학술적 보호가치가 매우 큰 만큼 하루빨리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망개나무란?


망개나무는 싸리처럼 줄기와 가지가 곧게 자라는 데다 불에 잘 타기 때문에 예전에는 멧대싸리 또는 살배나무라고 부르던 나무다. 대나무처럼 나무결이 곧고 잘 쪼개지는 성질이 있어 돗자리 재료로 많이 쓰였는데 망개나무 돗자리는 사용하면 할수록 윤기가 나고 질감이 좋아져 최고급으로 쳤다 한다.

그러나 민간에서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이 망개나무를 닳여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개체수가 줄어드는 수난을 겪었다. 속리산서 처음 발견돼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던 법주사 입구의 망개나무도 이 속설로 인해 고사된 불운의 나무다.

 

 

망개나무
 

 

 

 <망개나무 열매>

 

망개나무의 가장 큰 특징은 줄기껍질에 세로로 깊게 팬 길쭉한 다이아몬드형 무늬가 있는 점이며 이파리는 가늘고 길며 검푸른 빛을 띠기 때문에 멀리서 보아도 다른 나무와 쉽게 구별된다.

꽃은 대추꽃과 매우 흡사하며 매년 6월쯤 가지 끝쪽의 잎겨드랑이에서 여러 개가 피되 한꺼번에 피지 않고 차례차례 피어난다. 열매는 긴 타원형의 팥모양으로 8~9월에 익는데 처음에는 노란색을 띠다가 차츰 진한 붉은색을 띤다.

이번에 발견된 속리산 주변의 자생지들은 대부분 바위가 많고 경사가 심한 개울가 근처에 위치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남한강과 합류 후 한강 향해 ‘새 여정’ 시작
 3백리 물길 마치는 곳에 탄금대 우뚝
합수지점은 끝이 아닌 영원한 시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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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단월 강수욕장을 지난 달래강은 이내 달천교 밑을 흐른다.

 

달천교 부근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제법 큰 나루가 있던 곳이다. 동래~한양간 영남대로를 잇던 나루터 대신 들어선 것이 달래강(달천)의 대표적인 다리 달천교다.
 

영남대로 옛길은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 쪽에서 유주막거리~충렬사~단호사를 거쳐 이곳 달천 나루를 건넌 다음 주덕으로 이어지던 ‘큰 길’이다. 지금으로 치면 경부고속도로의 중간 길목인 셈이다.
 

현재 달천교는 두 개의 다리가 나란히 서있다. 둘 다 얼마 전 새로 놓인 2차선 다리로 서울·청주 쪽으로 가는 다리는 1990년에, 충주 시내쪽으로 들어가는 다리는 1999년에 각각 세워졌다. 예전 배가 다닐 땐 인근에 뱃사공들이 머물던 집들과 주막촌이 형성돼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질주하는 차량들 사이로 강물을 바라보니 물흐름이 무척이나 여유롭다. 강줄기의 끝자락인 남한강과의 합류점이 얼마 남지 않아 ‘달래강으로서의 생(生)’에 대한 미련에서일까. 아니면 3백리 물길을 잰 몸짓으로 달려온 피곤함 때문일까.
 

지난 여정이 거의 대부분 산골짜기를 지나는 계류였기에 이런 모습이 낯설다. 몇 배로 넓어진 강가로는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옆으론 시가지가 ‘도회지 빛’을 하고 있다.
 

천왕봉 기슭서 발원해 속리산 골짜기를 흘러내릴 때의 거친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갓 시집 온 새색시의 수줍은 발걸음을 하고 있다.
 

다만 그 맑디 맑던 물빛깔은 도처에서 받아들인 인간냄새 때문인지 거무칙칙하고 물내음마저 비릿하다. 안쓰럽다.
 

물소리도 마냥 조용하다. 3백리 본류와 숱한 지류를 지나면서 안고 온 사연과 전설들이 무척 많기에 제법 떠들썩할 법도 한 데 더없이 잔잔하다.   

 
‘달라진 물흐름’은 그렇게 조용히, 그리고 서둘지 않고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합수 직전의 달래강
달래강은 남한강과 합류하기 직전 지류인 요도천과 충주천을 받아들인 후 곧바로 탄금교 아래서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앞에 보이는 다리가 1977년 준공된 탄금교이다.

나그네의 발걸음도 미련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그간 정이 든 때문일까.

 

탄금대가 고구마처럼 떠있는 합류점으로 향하는 발길이 왠지 무겁다.


이제 탄금대다.

 

달래강 물길 답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머릿속에 되뇌 온 취재의 종착지가 아니던가.

 

속리산 천왕봉 발원지서 남한강 합수머리까지 물길 답사의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감회가 새롭다.
 

하지만 탄금대는 단순한 마침표가 아니다. 오히려 달래강이 탄생시킨 방점(傍點)이라고 해야 옳을 성 싶다.

 

달래강의 혼과 얼이 담긴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비록 동서 방향 길이가 1km 남짓하고 남북 방향의 너비가 600m 밖에 안 되는 데다 상대고도(해발고도 106m-최저고도 65m)가 40m밖에 되지 않는, 그야말로 ‘작은 봉우리’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깃든 혼과 얼로 인해 달래강 전 물길을 대표하는 명승지이자 역사·교육의 장으로 우뚝 솟아있지 않은가.

 

 

 

 

탄금대에 세워진 악성 우륵선생 추모비(위)와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 노래비(아래)

 

우선 탄금대(彈琴臺)는 그 명칭이 전해주 듯 가야국의 악성 우륵이 1400여년 전 가야금을 타며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우리나라 국악의 발상지다.

 

또 탄금대는 신립장군이 임진왜란때 천추의 한을 품고 장열하게 최후를 마친 전적지이며 일제강점기때 소설과 시로써 민족정기를 일깨운 독립유공자 권태응선생의 ‘감자꽃’ 노래비가 있는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탄금대는 곧 충주시민들의 정서적 고향이자 자랑이다. 그런 탄금대가, 그를 낳은 달래강이 이제 막 ‘달래강으로서의 생’을 마감하려는 곳에 위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니 필연이다. 그 필연은 특히 강 건너편, 즉 금가면 쪽에서 바라보면 더욱 실감한다.

 

그것은 바로 달래강이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게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비로소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분명 눈앞에 펼쳐진 합수 광경은 달래강이 남한강과 한 몸이 되어 새로운 본류인 한강을 향해 새 여정을 시작하는 출발점인 것이다.

 

 

남한강 건너편서 바라본 합수 장면
달래강은 충주 탄금대 부근서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그러나 남한강과의 합수가 끝이 아니다. 남한강과 한 몸이 된 물길은 또 다시 새로운 본류인 한강을 향해 새 여정을 시작한다. 왼쪽으로 보이는 나즈막한 구릉이 충주시민의 정서적 고향이자 자랑인 탄금대이고 오른쪽 다리가 탄금교이다.
 

새로운 출발, 새로운 물흐름을 시작하는 곳에 탄금대는 그렇게 필연으로 서 있다.

 

생각의 초점을 과거 소금배와 세곡선이 다니던 시절로 되돌려 본다.

 

남한강을 거슬러 온 당시 뱃사공들은 이곳 합수머리를 거쳐 달래강으로 올랐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곳이 바로 달래강 뱃길의 시작점임을 뜻하는 것 아닌가.

 

당시의 뱃길은 소금과 같은 해산물의 유입 통로 내지 세곡의 운반로였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외부의 소식이나 문화가 유입된 ‘소통의 길’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3백리 물길을 함께 해온 나그네는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달래강이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합수지점 탄금대는 끝이 아닌 영원한 시작점이란 것을….<계속>

 

남한강과 더불어 조곡 운반하던 뱃길 역할
감물 유창리·불정 남창리 등에 漕倉 지명
목도까지는 노·삿대로 움직이는 배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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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이래로 강줄기는 그 자체가 인간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물류이동의 근간이 돼 왔다. 남한강을 포함한 한강 줄기 역시 한반도인들에겐 생명과도 같은 젖줄이었다.


선사시대 이후의 문화유적 다수가 한강과 남한강변을 따라 산재해 있고 뱃길, 즉 수운(水運)이 이뤄졌음을 알려주는 포구와 창고들이 아직도 곳곳에 흔적처럼 남아있음은 이를 입증해 준다.
 

수운은 단순히 강 하구의 해산물과 내륙의 농·임산물을 실어나르는 물류 이동 외에도 나라 살림의 근간이 되는 조세(세곡)를 운반(漕運)하는 중요 역할까지 담당해 왔다.


남한강과 그 지류인 달래강에도 오래전부터 조운이 이뤄졌음을 알려주는 조창(漕倉: 세곡을 보관하기 위해 강변에 설치한 창고)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초의 13조창 가운데 하나인 충주 덕흥창과 조선시대 조창인 연천 곶창(串倉), 앙엄 곶창이 그것이다.

 

고려 덕흥창은 지금의 충주시 가금면 강안의 여수포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연천 곶창은 충주의 서쪽 10리(가금면 창동리)에, 앙엄 곶창은 충주의 서쪽 60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들 조창을 통해서는 충주,단양,청풍,괴산,음성,연풍,제천 등지에서 걷힌 세곡이 수도의 경창(京倉)으로 옮겨졌다.
 

100년 전(일부 주민들에 의하면 1940년대까지)만 해도 소금배가 드나들었던 오간리 포구(괴산군 감물면 오간리)를 뒤로 하고 왼쪽으로 물굽이를 틀어 만나게 되는 곳이 유창리(有倉里)인데 지명에서도 풍기듯이 이 마을에도 조선시대 조창이 있었던 곳이다.

 

또 유창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불정면 남창리에도 조선시대 조창이 있어 인근지역서 거둬들인 세곡들을 달래강 뱃길을 통해 충주쪽 곶창으로 옮겼다가 다시 남한강 배편으로 경창으로 옮겼다.
 

지금으로부터 324년전인 1684년(숙종 7년) 발간된 규장각도서 괴산군 읍지 창고편에 보면 유창리 조창에는 쌀 93석 11말 4되 9홉 가량이 걷힌 것으로 기록돼 있다. 조창을 통해선 또 공물도 조달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충주·괴산 지역에서는 꿀,칠,대추,지초,여우가죽,수달피,삵가죽,족제비털 등이 바쳐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배편으로 서울까지는 얼마나 걸렸을까. 1930년 이영(李英)이 지은 ‘충주발전사’에 의하면 충주부터 하류까지는 결빙기나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매일 항행했는데 충주 탄금대(달래강과 남한강 합류점)로부터 서울 용산까지 약 315리를 여름철에 하행할 경우 약 12~15시간, 상행할 경우는 5~7일 가량 소요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강물이 많아 뱃길이 순조로울 경우이고 보통은 하행시간이 3일, 상행시간은 10일에서 2주일 가량 걸렸다고 한다.

 

배는 돛단배였으며 한 배의 적재량은 많게는 40석, 보통은 35~25석 가량이었다고 전한다.  

 

유창리에서 다시 하류로 내려가다 보면 강 건너 편에 ‘고려말 철안석불좌상(충북문화재자료 27호)’이 서있는 미륵댕이(지장리)란 곳으로 달래강 지류인 신항천이 흘러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도 예전에 소금배가 들렸다고 전하고 있다.

 

 

소금배 드나들던 미륵댕이
달래강으로 신항천이 흘러드는 미륵댕이에도 예전에 소금배가 들렸다고 전하고 있으나 지형이 크게 변해 있다.
 

이 미륵댕이를 조금 지나면 왼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커다란 바위가 나타난다. 이름하여 ‘구경바위’다.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면 인근경치가 구경할 만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경바위를 호기심에 올라서니 전해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니다.

 

동에서 북으로 굽이치며 흐르는 달래강 푸른 물결이 소나무 가지의 자유스런 몸짓과 어울어진 게 여간 멋진 게 아니다.

 

눈길을 돌려 수십길 아래를 바라보니 강물 위로 기다란 바위 면이  잠길 듯 말 듯 빼곰이 나와있다. 송장바위다. 얼핏 보니 진짜 물위에 떠 있는 송장처럼 보인다.

 

 

구경바위에서 바라본 달래강
괴산군 불정면 미륵댕이를 지나 목도쪽으로 가다보면 강변으로 깎아지른 듯한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는데 이름하여 ‘구경바위’다.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면 인근경치가 구경할 만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내는 구경바위에서 내려다본 ‘송장바위’
.

구경바위 건너 편으로는 또다시 오른쪽으로 절벽이 나타난다. 지금은 절벽 밑으로 유창리를 드나드는 도로가 개설돼 있어 옛 정취가 많이 사라졌지만 절벽 한 쪽에 ‘소금강’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을 정도로 예전엔 경치가 무척이나 빼어났던 곳이다.
 

북쪽을 향해 흐르는 달래강을 배경으로 ‘소금강’의 전경을 촬영하려 하는데 때마침 가을바람에 한층 높아진 하늘 위로 흰구름 한 무리가 산자락 끝에 매달려 재주를 부린다. 가히 절경이다.

 

 

괴산 목도 부근의 달래강
괴산 목도 인근의 구경바위 건너 편 절벽에는 ‘소금강’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을 정도로 예전엔 경치가 무척 빼어났던 곳이다. 북쪽을 향해 흐르는 달래강 물결과 먼 산 위로 피어 오른 흰구름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절경을 뒤로하고 이내 들어선 목도(괴산군 불정면 면소재지)에는 미리 약속한 향토사학자 김영수·김영식씨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차 한잔을 마시며 김영수씨로부터 “불정면 목도리는 예부터 ‘목나루’라고도 불렸는데 한자로는 기를 목(牧), 건널 도(渡)로 음성천과 달천강의 합수머리 들판서 말을 많이 길러 목나루라 한 것이 지금의 목도가 됐다”는 유래를 듣고는 예전에 목나루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목나루는 지금의 목도교 바로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김영수씨(74)에 의하면 남한강 줄기에는 두 개의 큰 나루가 있었는데 그 중 남한강 본류에 있는 충주 엄정면의 목계나루가 가장 컸고 그 다음으로 이곳 목도나루가 컸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목도가 불정면 소재지가 되면서 목도나루가 생겼고 1938년 인근에 제방이 쌓이면서 시장이 더욱 번창했으며 1959년 나루 바로 위쪽에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질 때까지 나루가 운영됐다고 한다.

 

 

예전의 목도나루를 설명하는 향토사학자 김영수(오른쪽)·김영식씨.

목도나루는 장호원-음성-목도-연풍-문경 혹은 장호원-음성-목도-입석-상주를 잇는 중요 길목으로서 주요 이용자인 음성군 소이면 일부와 괴산군 불정·감물면 전역, 장연면 일부지역 사람들이 여름에 보리 한 말, 가을에 벼 한 말씩 모두 380여 석을 모아 뱃삯으로 주었다고 한다.

 

목도나루의 나룻배는 낙찰제로 운영됐으며 대략 일년에 벼 160여 석에 낙찰됐다고 한다.

 

김씨는 또 남한강 뱃길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증언을 해줬다. 그에 의하면 남한강 본류까지는 커다란 황포돛단배가 다녔지만 지류인 달래강으로는 그보다 작은 배, 즉 노와 삿대로 움직이는 배가 다녔다는 것이다. 김씨는 그 배의 길이가 대략 22자 정도(6~7m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또 당시에는 배가 여울을 통과할 때 동원되는 장정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었으며 목도시장 안에는 주막도 많고 상점도 많아 ‘돈’이 많이 오갔기 때문에 주변에는 소위 어깨잡이들이 들끓었다고 증언했다.

"천왕봉서 물머리 일으켜 3백리 물길 시작" 
실질적인 시작점은 백두대간 마루금
'속리천'이란 이명으로 최상류 흘러

 

 

■달래강 물길의 시작점


달래강 물길은 그동안 속리산 비로봉 아래 상고암 약수로부터 시작된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번 탐사 결과 달래강의 제1 발원지는 천왕봉 아래의 봉수대터 샘물임이 새롭게 밝혀짐에 따라 달래강 3백리 물길은 바로 이 샘물로부터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물론 실질적인 물흐름이야 천왕봉서 문장대를 잇는 백두대간 마루금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지만 학계서 인정하는 강의 시작점은 '하구 또는 합류지점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샘물 형태의 물뿌리(水源)'이기에 천왕봉 봉수대터 샘물이 진정한 '달래강의 시작점'인 것이다.


다만 이번에 함께 찾아진 비로봉 남쪽사면의 굿당터 샘물(제2 발원지-상환암과 천왕봉을 잇는 등산로변 바위굴 샘물)과 기존의 발원지로 알려진 상고암 약수(제3 발원지)도 달래강의 주요 시작점으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들 발원 샘물들은 각기 몸을 일으켜 법주사쪽 골짜기로 흘러들면서 달래강의 최상류 수역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 천왕봉의 봉수대터 샘물은 서북방향으로 물흐름을 시작해 산의 중허리 쯤에서 제2 발원샘인 굿당터 샘물과 몸을 섞은 다음 이내 상환암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다가 잠시 은폭동 폭포서 몸을 떨군 다음 비로산장 아래 삼거리(등산로를 따라 경업대·상고암 방면과 상환암·천왕봉 방면으로 나눠지는 갈림길)서 비로산장쪽으로부터 흘러오는 물길과 하나가 된다.

 

발원 샘물의 합수
천왕봉과 비로봉에서 각기 발원한 달래강 물머리는 비로산장 아래 삼거리(천왕봉·상환암쪽 등산로 입구)에서 서로 만나 비로소 하나의 물줄기를 이룬다. 왼쪽이 상고암·경업대쪽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 오른쪽이 비로봉 남쪽사면과 천왕봉·상환암쪽서 내려오는 물줄기.


비로산장쪽의 물길이란 다름 아닌 상고암 약수로부터 시작한 물줄기와 경업대·입석대쪽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상고암 입구 삼거리(경업대 방면과 상고암 방면의 갈림길)서 만나 비로산장을 거쳐 내려오는 물길을 말한다.


이들 주요 발원지 물길의 특징은 처음엔 석간수 형태의 샘물을 이루다가 샘물 밖을 벗어나 물흐름을 시작하면 다시 돌과 바위틈으로 스며들어 모습을 감췄다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길 수십 차례씩 반복하면서 앞서 말한 합류점(비로산장 상·하부)에 와서야 비로소 계곡수 형태를 띤다는 점이다.


이들 물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갑자기 물은 보이지 않고 돌과 바위 밑으로 졸졸거리며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 이른바 건천지역이 유난히 많다. 그러다가도 여름철 장마 기간이 돼 유수량이 많아지면 물길이 겉으로 드러나 크고 작은 폭포와 급류를 이루는 등 새하얀 물줄기가 온 골짜기를 떠들썩하게 만든다.


비로산장 아래부터 제법 계곡수 형태를 띠기 시작한 달래강 물길은 다시 세심정 부근서 문장대쪽 물줄기와 합쳐지면서 몸집을 불린 뒤 조선 세조대왕이 피부병을 고쳤다는 목욕소를 지나 태평교 밑에서 사내저수지로 흘러든다.


사내저수지는 달래강이 속리산서 물머리를 일으킨 후 미처 산자락을 벗어나기 전에 만나는 첫 인공 구조물로서 인근 법주사를 비롯한 속리산면 일대의 주요 상수원 역할을 하고 있다.


보은군이 관리하는 사내저수지 상수원은 자연유하식 식수전용댐으로서 총 14만2,500톤의 저수용량을 갖고 있다. 보은군은 이곳 상수원을 통해 모두 485가구 1,759명의 주민들에게 하루 1,238톤의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보은군은 지난 1988년부터 사내저수지를 포함한 속리산 자연환경보전지역내 계곡들을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발원지에서 사내저수지까지
달래강은 처음엔 석간수 형태의 샘물을 이루다가 샘물을 떠나 물흐름을 시작하면 다시 돌과 바위틈으로 스며들어 모습을 감췄다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길 수십 차례 반복하면서 비로산장과 세심정 부근에 와서야 비로소 계곡수 형태를 띤다. 세심정 부근서 문장대쪽 물줄기와 합쳐진 달래강 물길은 목욕소를 지나 태평교 밑에서 사내저수지(맨 오른쪽)로 흘러든다.

 

■속리천의 이름으로


사내저수지를 지난 물길은 법주사 바로 앞에서 동암쪽 계곡수와 만나면서 '속리천'이란 이름으로 사내리를 향해 물머리를 남쪽으로 튼다. 속리천은 달래강 물길이 발원지로부터 흘러내려 오면서 처음으로 얻게되는 '법정 하천(지방 2급 하천)으로서의 명칭'이다. 따라서 이곳부터는 계곡수 형태를 벗어나 비로소 '자연하천'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고 수량도 많아진다.


속리천이란 이름은 달래강이 하류로 내려가면서 구간에 따라 달리 불려지는 여러 이명(異名) 중의 하나로, 물길이 청원군 미원면 관내로 접어들어 '박대천'이란 이름으로 불려지기 전까지의 명칭이다.

 

속리천이란 이름으로
사내저수지를 지난 물길은 법주사 바로 앞에서 동암쪽 계곡수와 만나면서 '속리천'이란 이름으로 사내리를 향해 물머리를 튼다.


법주사를 지난 물길은 다시 야영장 부근서 남산쪽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물길과 합류한 후 사내리 집단시설지구(상가지역)와 법주사를 잇는 다리를 지나 하천내에 설치된 분수대서 잠시 몸을 풀어헤친 뒤 묘봉쪽서 내려온 물길과 합쳐져 정이품송을 향해 줄달음질 친다.


법주사에서 사내리 집단시설지구까지 흐르는 동안 달래강 물길은 처음으로 '인간냄새'를 맡으면서 물빛도 달라지고 수질도 드디어 'BOD'를 띠기 시작한다.


상가지역 건너편 사낙골을 지나 대형버스 주차장을 옆으로 끼고 산모퉁이를 도니 이내 '국민 소나무' 정이품송이 600여년의 전설을 머리에 인 채 물길을 반긴다.

 

하지만 우산을 펼쳐 놓은 듯 말끔하던 예전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태풍에 잘려져 나간 상처를 허공에 떠 받들고 누런 솔잎에다 흉칙한 철기둥을 버팀목 삼아 근근이 서 있는 게 여간 측은해 보이는 게 아니다.

 

현재의 병색도 병색이거니와 그 병색을 더욱 짙게 만든 것이 다름아닌  인근 하천의 습기, 즉 달래강(속리천) 물길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안쓰럽다.

 

바로 옆으로 도로 공사를 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뿌리를 흙으로 깊게 덮는 바람에 물빠짐이 불리해져 화근이 된 데다 인근 하천에서는 끊임없이 수분을 과잉공급해 물과는 상극인 소나무 건강이 더욱 악화된 것이다. 유일한 '벼슬나무'이기에 수시로 링거주사를 맞는 호강(?)을 누리고는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병색이 짙어지는 것을 보면 그 명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백두대간과 한남금북정맥이 주요 분수계 역할
동북으로는 백두대간이 낙동강과 경계 지어
서북으로는 한남금북정맥이 금강과 물길 나눠


산과 물을 말할 때 요즘은 흔히 분수령과 마루금,재,분수계,수계란 말들을 사용하는데 이는 뒤에 설명하는 '산경표'에서 나온 개념들이다.


우선 분수령이란 산에 관한 개념으로서, 글자 그대로 물을 나누는 마루, 즉 산의 양쪽 사면이 만나는 곳 혹은 산의 양쪽 사면이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능선과 같은 말이다. 마루금은 이 분수령(능선)을 서로 연결한 금(선)을 뜻하고 말티재,질마재,모래재 등의 '재'는 능선 중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그 반대가 봉우리다.


또 분수계는 하나의 강 유역을 완전히 에두른 분수령의 집합으로 다른 강 유역과 구분되는 영역을, 수계는 분수계로 둘러싸인 안쪽의 전 영역을 일컬을 때 쓰인다. 다만 분수계는 산과 관련된 개념인 반면 수계는 물에 관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달래강(달천) 유역의 분수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대체적으로 달래강이 흐르는 방향인 북쪽을 향해 오른쪽으로는 백두대간을 따라 낙동강과 경계를 이루고 왼쪽으로는 한남금북정맥을 따라 금강과 경계를 이룬다.

 

■백두대간과 달래강

 

백두대간은 남한강 지류인 달래강 유역을 낙동강 유역과 동·서로 구분짓게 하는 중요 분수령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속리산 천왕봉을 기점으로 북쪽을 향해 조령산 인근의 마력봉까지 줄달음을 하면서 동으로는 낙동강 물줄기를 일으키고 서로는 달래강 물줄기를 일으킨다.


속리산 천왕봉서 시작해 마력봉까지 이어진 마루금을 따라 가자면, 우선 속리산 연봉인 비로봉,신선대,문장대 등을 차례로 지나 경북 용화와 화북을 연결하는 밤티에 이어 늘재를 만난 뒤 청화산,조항산,대야산,장성봉,희양산,시루봉,이만봉,백화산,황학산으로 이어졌다가 이내 이화령과 조령산,조령3관문을 지나 마지막으로 마력봉을 만난다.


이렇게 이어진 마루금은 대부분 충북과 경북 도계를 지나면서 능선으로 떨어진 빗방울을 둘로 나누는 분수령 역할 뿐만 아니라 양 지역의 문화를 각기 달리 형성시킨 문화적 산파 역할을 해오고 있다.


마력봉에서 백두대간과 갈라져 다시 방향을 바꾼 마루금은 월악산쪽 지릅재를 거쳐 대미산과 남산,마지막재,계명산으로 이어지면서 남한강 본류 수계인 동달천,내사천,충주호 등과 경계를 이룬다.


속리산 천왕봉으로부터 백두대간을 따라 마력봉까지 이어졌다가 다시 충주 관내 계명산까지 이어진 마루금은 달래강의 오른쪽 유역, 즉 동북쪽 유역을 이루는 분수계 역할을 한다.

 

백두대간의 '늘재'
백두대간은 남한강 지류인 달래강 유역을 낙동강 유역과 구분짓는 중요 분수령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은 백두대간의 여러 분수령 가운데 하나인 늘재로, 오른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경북 상주시 쪽에서 바라본 늘재 △분수령 안내판 △충북 괴산 송면 쪽에서 바라본 전경 △고갯마루의 백두대간비.

 

백두대간의 '밤티'
속리산 문장대로부터 백두대간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경북 상주시의 밤티. 원내는 경북 용화에서 화북 방향으로 바라본  밤티 모습.

 

■한남금북정맥과 달래강


속리산 천왕봉으로부터 백두대간이 북쪽을 향해 오른쪽으로 달래강과 낙동강 유역을 나누는 것과는 달리 한남금북정맥은 왼쪽 방향으로 북쪽을 향해 치달으면서 달래강과 금강유역을 구분짓는다.


속리산 천왕봉서 처음엔 남서쪽으로 뻗기 시작한 한남금북정맥은 이어 속리산 관문인 말티고개(현재 속리터널이 인근에 뚫렸지만 여전히 버스노선으로 이용되는 등 관문역할을 하고 있슴)를 지나면서 서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장구봉,탁주봉,시루산,구봉산,국사봉,머구미재를 지나 청주 인근의 선두산,선도산,상당산으로 접어든다.

 

이어 충북 청원의 미원과 내수읍(초정 약수터)을 잇는 이티재를 지나 구녀산과 좌구산을 넘으면 괴산군의 청천 쪽에서 청안을 넘나드는 질마재가 나오고 이내 칠보산을 거쳐 괴산읍과 증평읍을 잇는 모래재를 지나 보광산,보천고개,행티재를 넘어 음성 관내의 소속리산에 이르게 된다. 소속리산에 다다른 한남금북정맥은 계속해서 경기도 안성의 칠현산을 거쳐 강화도를 향해 달리지만 달래강과의 인연은 소속리산 자락에서 끝을 맺는다.


한남금북정맥에서 갈라져 다시 방향을 튼 마루금은 음성 감우재를 지나 부용산과 수레의산,덕고개,자주봉산,솔고개,평풍산으로 이어지면서 남한강 본류 수계인 청미천과 앙성천,한포천 등과 경계를 이룬다.


이곳까지의 마루금은 달래강의 서남쪽 유역을 이루는 분수계 역할을 한다.

 

한남금북정맥
백두대간의 속리산 천왕봉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한남금북정맥은 북쪽을 향해 왼쪽 방향으로 치달으면서 달래강과 금강유역을 구분짓는 분수령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은 보은 삼년산성에서 바라본 한남금북정맥의 전경으로 오른쪽으로부터 천왕봉과 말티고개가 보인다.

 

■산경표


산경표는 우리 나라의 산이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디로 흐르며 어디서 끝나는지를 족보 형식으로 도표화한 지리서다. 저자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여암 신경준으로 알려졌으나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이 동국문헌비고(영조46년, 1770년)에 수록된 신경준의 여지고와 산수고를 바탕으로 편찬된 것은 분명하다.


이 책은 백두산을 시작으로 전국의 산줄기를 1개의 대간과 1개의 정간, 13개의 정맥으로 분류했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 이후의 산맥 분류 체계와 전혀 다르다. 산경표에서 간(幹)은 줄기를, 맥(脈)은 줄기에서 뻗어나간 갈래를 지칭한다.


백두대간과 한남금북정맥은 이 책의 분류에 따른 것으로 백두대간은 백두산으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커다란 기둥줄기를 일컫고 이 기둥줄기로부터 뻗어나간 2차적인 갈래를 정간과 정맥이라 하는데 한남금북정맥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속리산 천왕봉으로부터 서북쪽으로 뻗은 줄기를 말한다.


흔히 말하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란 말도 산경표에서 나온 말로 '산 스스로 물을 나누는 경계, 즉 산은 물을 가르지 않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인다. 산경도는 산경표를 지도화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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