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구의 한과 실학정신

조선 최대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 중 전어지에 '돗고기'가 소개돼 있다. "머리는 작고 배가 부르며 꼬리는 뾰족하고 끝이 둘로 갈라진다. 주둥이는 가늘고 뾰족하며 등은 검고 눈은 작다. 몸의 생김새가 돼지 새끼와 비슷해 돗고기로 불린다. 지렁이를 미끼로 써서 낚는다."
200년 전의 기록치고는 매우 상세하다. 놀랍다.
임원경제지를 지은 이는 실학자 서유구다. 19세기 초에 이미 농업개혁론을 부르짖은 선지자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1801~1818년)하던 비슷한 시기(1806~1824년), 비슷한 기간(약 18년) 동안 은둔생활하면서 쓴 책이 임원경제지다. 총 113권 52책에 글잣수만 250만자에 이른다.
그로부터 반세기 뒤인 1872년 국제학술지에 'Pungtungia herzi'란 신종 물고기가 발표됐다. 발표자(명명자)는 헤르첸슈타인이란 외국 학자로, 그는 조선의 풍중이란 곳에서 채집한 물고기 1종을 지역명과 자신 이름을 따 신종으로 기재했다. 헤르첸슈타인은 당시 이 물고기에 대해 형태적으로만 간략히 소개했다.
주목할 것은 헤르첸슈타인이 발표한 이 물고기가 한반도 물고기로는 처음으로 학술지에 공식 기재됐다는 점이다. 학술지에 처음으로 기재됐다함은 국내 물고기가 비로소 학계에 알려졌다는 얘기다.
두 사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돌고기다. 서유구가 돗고기로 소개한 돈어(豚魚)와 헤르첸슈타인이 신종 발표한 물고기는 종이 같은 돌고기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안타까운 사실이 있다. 서유구의 한이라 할까, 당시 미개국이었던 조선 사회의 학문적 한계라고 할까. 시기적으로 헤르첸슈타인보다 최소 40여년 앞선 시기에 돌고기에 관한 내용을 책으로 처음 기록했으면서 학계로부터 첫 기재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되새겨 보자는 말이다.
어떤 생물종을 발견해 신종 발표하기 위해선 국제명명규약에 따라 학명을 짓고 정확한 분류와 기재를 한 다음 출판하고 학계에 보고해야 한다. 린네(1707~1778년)가 이명법을 창안한 이래 생긴 국제관례다.
이러한 사실만 서유구가 알았더라도 당시 전어지에 소개한 물고기를 어엿한 신종 물고기로 발표했거나 최소한 조선의 어류목록으로 기록하는 또 다른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정은 그렇질 못했다. 서유구가 임원경제지를 쓰면서 인용한 서적이 약 900종에 이르고 참고한 서적만도 수천 종에 이르지만 서양의 선진학문인 생물분류학적 지식은 접하질 못했다.
돌고기의 한은 또 한 차례 이어졌다. 1935년 일본인 모리가 또 다시 감돌고기(Pseudopungtungia nigra Mori)를 신종 발표한 것이다. 채집지는 영동(황간)과 진안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까지의 암흑기가 지나면서 국내 어류학계에도 서광이 찾아들어 1975년 드디어 김익수박사가 국내 학자로선 처음으로 참종개를 신종 발표한 것을 비롯해 지난 30여년간 총 20종의 물고기가 국내 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기재됐다. 그 중에는 돌고기의 1종인 가는돌고기(1980년 전상린박사 발표)도 포함돼 있다. 3종의 한국산 돌고기 중 1종이나마 국내 학자가 찾아낸 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헤르첸슈타인 이후 100여년간 맺혀온 한이 다소나마 풀린 셈이다.
돌고기의 한을 되짚어보면서 당대 석학 서유구가 가졌던 신념을 떠올려봤다.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 즉 일상의 경제생활에 필요한 실용의 학문을 집대성하겠다"는 확고한 신념 말이다. 그는 그런 의지로 임원경제지를 썼다. 전어지에 물고기 잡는 법과 어구를 자세히 설명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게 헤르첸슈타인과 달랐던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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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 랜드마크 '금강'은 이제 슬프다

 

 

금강은 특별하다. 전북서 발원해 1천리를 굽이치고도 다시 전북을 거쳐 서해로 흘러든다. 큰 강 치고 발원지와 종착지가 한 도(道)에 있는 건 금강 뿐이다. 그러면서 물줄기는 전라 경상 충청을 아우른다. 그래서 삼기(三岐)의 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금강을 금강답게 특징 지웠던 것은 금빛 백사장을 끼고 수놓 듯 흐르던 푸른 물결이었다. 오죽했으면 비단강(錦江)이라 했겠는가.
푸른 물빛과 함께 곳곳에 펼쳐졌던 황금빛 모래사장은 가히 금강의 대명사였다. 대전 인근의 신탄진과 청원 부용의 금호리 일대는 해수욕장이 보편화 되기 이전에 이미 강수욕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곱디 고운 모래사장은 지류 곳곳에도 펼쳐져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곳이 미호천이다. 지금도 청주시민의 추억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팔결다리 백사장과 까치내 백사장은 학생들의 소풍 장소이자 주민들의 천렵 장소로서 손꼽히던 명소였다.

 


금강은 또 여러 생명체를 껴안은 생명의 강이었다. 서식 환경이 다양하니 그곳에 깃든 동식물도 다양할 수밖에. 물고기만 해도 그렇다. 전세계에 오로지 금강수계에만 사는 미호종개(천연기념물 454호, 멸종위기Ⅰ급)를 비롯해 어름치(〃 238·259호), 감돌고기(멸종위기Ⅰ급), 흰수마자(〃), 퉁사리(〃), 꾸구리(〃Ⅱ급), 돌상어(〃), 둑중개(〃), 금강모치, 종어 등 이름만 들어도 반갑고 소중한 물고기들이 지천했다.
'익수키미아 초이(Iksookimia choii-미호종개의 학명)'의 주인공 전북대 김익수교수가 '미호천엔 색다른 물고기가 살 것'이란 학술적 상상을 가짐으로써 결국 미호종개를 발견해 냈던 모티브도 바로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면서 봐왔던 미호천 모래사장이었다. 금강은 또 '물고기 할아버지' 고 최기철박사의 학문적 고향이기도 하다.
필자 역시 금강에 애착을 갖고 있다. 지류이긴 하지만 금강 언저리서 태어나 그 물에 멱 감으며 자랐고, 언론사에 몸 담은 뒤론 줄곧 '주요 출입처'로서 늘 관심을 가져왔다. 금강 토박이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인연이요 당연함이었다.

 


그러나 이제 금강은 슬프다. 보면 볼수록 가슴 설렜던 본래 모습은 이미 사라졌다. 적어도 비단강 시절의 금강은 이젠 없다. 속살이 훤히 비치던 푸른 물결도, 금가루가 금세 묻어 나올 것만 같던 모래사장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생명의 숨소리도 야위어 있다. 부여의 진상품이던 종어는 오래 전에 절종됐고 어름치는 수십년째 자취를 감췄다가 최근 인공복원됐다. 뿐만 아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랫바닥을 훑기만 해도 한 줌씩 잡혀나왔던 재첩은 물론 갈퀴질 한 번에 대여섯 마리씩 튀어나왔던 모래무지, 커다란 그림자를 그리며 떼지어다닌다 하여 멍석이라 불렀던 잉어떼들…. 모두가 옛날 얘기다.

 


강은 자체가 생명이다. 생로병사가 있다. 수십,수백 억 년을 라이프사이클(Life Cycle)에 따라 모습을 갖춰온 복합생명체다. 그러나 그같은 복합생명체도 '인위'에는 약하다. 강의 최대 천적은 인간이다.
어느날 졸지에 물흐름이 바뀌고 곳곳이 단절된 채 상하류가 뒤죽박죽 된 것도 사람에 의해서요, 한반도 형성기부터 뿌리 내려온 물고기들이 어느 한 순간 사라져간 것도 사람에 의해서다.

 


금강은 이제 절체절명의 기로에 서 있다. 가뜩이나 벼랑끝 신세이던 금강이 목하 4대강 사업의 손안에서 '조각(彫刻)'되고 있다. 성공 여부를 떠나서, 숱한 세월을 이어온 자연의 라이프사이클에 감히 마구 손을 대도 되는 건지 시간이 흐를수록 두렵다.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는 금강의 라이프사이클, 그 와중에 우리들 추억속 랜드마크까지 갈가리 '조각'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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