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룩뱀의 꾀꼬리 포식, 그 생생한 장면을 찍다

 
 지난 2일엔 평생 한번 볼까말까 하는 진기한 광경을, 그것도 야외 사진촬영 현장에서 생생히 목격했다. 생태사진을 하는 사람으로서 대단한 행운이라 생각한다.
   그날 아침 카메라 가방을 챙기면서 오늘은 어디로 향할까 생각하다 문득 며칠전 꾀꼬리 소리가 들렸던 괴산의 한 밤나무숲이 떠올라 서둘러 집을 나섰다. 현장에 도착하니 꾀꼬리 한쌍이 날카롭게 경계음을 냈다. 낯선 방문객이 침범했다는 자기들만의 신호였지만, 새 울음소리만 들어도 그들의 속내를 알 수 있기에 오히려 “우리 둥지 이 근처에 있소” 라는 고백처럼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위를 살핀 지 3분도 안돼 나뭇가지에 매달린 둥지가 눈에 들어왔다. 둥지 한구석으론 불그스레한 새끼 주둥이까지 보였다. 몸집이 어느 정도 자라 있다는 증거다. 직감은 적중했다. 부화한 지 열흘 이상 지난 새끼 4마리였다.


 위장텐트를 치고 곧바로 사진촬영에 들어갔다. 꾀꼬리의 먹이장면은 이미 몇 년 전 촬영한 바 있으나 그 땐 필름카메라였다. 해서 올핸 기필코 디지털카메라로 다시 찍기로 마음먹어 오던 터였다.
 망원 카메라를 설치하고 기다리길 3시간여. 말이 3시간여지 불과 1㎡도 안 되는 좁은 텐트안에서 30도가 넘는 무더위에 꼼짝 않고 갇혀 있기란 여간 인내심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무릎에 쥐가 나고 허리가 저려도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조건 참고 기다려야 했다. 한데 그 놈(?)의 꾀꼬리 어미들은 왜 그리 의심이 많은지. 웬 낯선 사람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 이상한 물체속에 들어가는 것을 본 어미들은 계속 경계음만 낼 뿐 먹이를 물어다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2개의 배터리 중 하나는 이미 소진한 상태여서 조바심까지 생겼다.


 그래도 오기가 있지, 너희들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 번 해보자고 막 다짐하고 있는데 갑자기 모니터에 이상한 장면이 나타났다. 둥지안에 있던 새끼 한 마리가 돌연 공중으로 떠오르는 게 아닌가.

    눈을 의심했지만 우선 셔터부터 눌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날개가 다 자라지도 않은 어린 새끼가 공중부양하듯 허공으로 떠올라 날개를 푸드득 거리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화면을 확대해 보았다. 아뿔사! 뱀이었다. 1m쯤 되는 커다란 누룩뱀 하나가 나무에 기어올라 새끼를 낚아챈 것이다. 잡힌 새끼는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 쳤지만 소용 없었다.

     이미 날카로운 이빨에 머리를 물려 입안으로 반쯤 들어간 상태였다. 놀란 건 어미들도 마찬가지였다. 새끼가 뱀에게 잡혀먹히는 것을 본 어미들은 피를 토하듯 울부짖었다. 캬~아 캬~아! 최악의 비상사태를 알리는 어미들의 다급한 콜음(CAll音)이 일순간 숲속을 뒤덮었다. 평소 낯선 사람이 둥지 근처만 지나가도 잽싸게 공격하는 꾀꼬리지만 그날따라 속수무책이었다.


 손에 땀이 났다. 더위도 잊혀졌다.

   아프리카 밀림에서나 볼수 있을 법한 야생의 먹이사슬 현장을 생비디오로 보며 사진촬영하는 행운이 나에게도 오다니,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기회를 놓칠 세라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동영상을 합쳐 2백컷을 찍었다.


 덕분에 소중한 경험과 자료를 얻었다. 하지만 아쉬움도 크다. 사흘을 더 그곳을 찾고도 어미가 먹이주는 장면은 찍지 못한 것이다. 첫날의 끔찍함 때문인지 그날 이후 나만 나타나면 처절한 CALL음을 내며 도무지 촬영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를 보면 누룩뱀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결국 연민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우리 생태계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누룩뱀의 포식장면, 그 생생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으니 여간 뿌듯한 게 아니다.

새들도 의사표현을 한다.

평화로울 땐 노래도 부르고 위급하면 경계신호도 보낸다.

슬픈땐 울부짓기도 하고 배고프면 보채기도 한다. 또 몸짓을 통해서도 의사를 소통한다.

조류학자가 꿈이었던 필자는 어릴 적 유난히도 새를 좋아했다.

오죽하면 등교하다가도 처음 보는 새를 만나면 호기심에 따라가 기필코 둥지를 발견한 후 새알 모양과 특징 등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학교가는게 다반사였을까.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새소리만 듣고도 종류는 물론 그 새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쯤은 대강 안다.

중학교때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날 걸어서 집에 가는데 도랑을 만났다.
풀이 우거진 도랑을 풀쩍 뛰어 건너는 순간 발밑에서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다.

뭔가가 '꽥∼'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뒤로 나자빠져 허우적거리는 게 아닌가. 기겁을 한 후 돌아서보니 해오라기였다.

건너뛰기전 풀에 가려 보이지 않던 해오라기가 갑자기 뛰어든 불청객에 놀라 그만 까무러쳤던 것이다.

그 일로 새들도 된통 놀라면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친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1살 어린 나이에 겁도 없이 30m가 넘는 동네어귀 미루나무에 올랐다 죽을 뻔한 일이다.

빈 까치 둥지에 부화한 어린 참새새끼가 탐이 나 며칠을 벼른 끝에 어른들이 들로 나간 틈을 타 나무에 올랐다.

처음부터 심상찮은 경계음을 내던 참새어미들은 어린 꼬마놈이 둥지 가까이 이르자 더욱 큰 소릴 내며 덤벼들 태세였다.
이윽고 손을 내밀어 둥지에 넣는 순간 작대기만한 황구렁이가 혀를 낼름거리며 불쑥 머리를 내미는 게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떨어질 뻔했지만 어디서 생긴 호기인지 되레 손으로 뱀머리를 내리치곤 똥줄이 빠져라 내려왔으니 지금도 생각하면 등줄기가 오싹하다.

그일 이후 새들은 상황에 따라 경계음을 달리 낸다는 걸 알았다.

새소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이른바 'SONG'과 'CALL'이다.

SONG은 말 그대로 노랫소리, 즉 평화스런 지저귐이다. 산란기를 맞은 암수컷이 서로 구애하거나 세력권을 표시할 때 내는 본능적인 의사표현이다.
반면 CALL은 SONG 이외의 소리, 즉 의사소통을 위한 사회적 언어다.
천적이 가까이 있거나 침입할 때의 신호음 또는 놀라서 내는 비명소리, 먹이를 달라고 조르는 소리, 무리를 지을 때 통일성을 가지려고 주고받는 소리가 포함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새들의 CALL 같은 불만의 목소리가 들끓고 있다.

집권층의 소통의 부재가 빚은 민중들의 CALL이 촛불축제와 시위를 통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오로지 재협상만이 쇠고기 수입문제의 해법이라 외쳐대는 어린 학생과 학부모들의 생존권적인 CALL, 온갖 악재로 생계를 위협받아 농기구 대신 피킷을 들고 나선 농민들의 한맺힌 CALL, 대운하 계획 등 무모한 정책을 즉각 중단하라는 환경론자들의 결사적인 CALL, 초고유가로 더이상 생업을 잇지못하겠다는 화물업계의 절규의 CALL 등 목소리도 다양하다.

하지만 이들 보다 더 무서운 CALL이 있다.

집단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속앓이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소리없는 CALL'이다. 그들이라고 어찌 나서고 싶지 않고 소리내어 외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침묵할 따름이다.

가슴에 응어리 지고 피가 맺혀도 이 땅에 '평화의 SONG'이 울려퍼지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그들은 희망한다. 민심 달래기에 급급한 임기응변식 사탕발림이 아닌, 소통을 통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진정 원한다.

가슴을 열고 생각해 보라.

새들은 해맑게 SONG을 부르는데 우리사회는 왜 CALL이 만연하는지.

하늘 보기가 민망하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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