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남대 초입 대청호변엔 한반도 역사의 뿌리를 가늠케 하는 중요한 유적지가 있었다. 이름하여 두루봉 동굴이라 하는 것인데, 지금은 동굴은커녕 산 밑자락까지 파헤쳐져 수십길 낭떠러지로 변한 흉물의 역사터다. 하지만 이 유적이 갖는 중요성 때문에 현행 교과서에 이름이 번듯하게 올라있는 '실체없는 선사유적지'다.

이 동굴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해는 1976년. 당시 모 광산이 석회암 채취를 위해 발파하던 중 예사롭잖은 동물뼈가 나와 충북대와 연세대 박물관이 긴급 발굴에 착수, 1983년까지 숱한 유물을 찾아냈다. 특히 이곳에서는 4만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에 살았던 두명의 사람뼈(그중 하나는 5세 가량의 '흥수아이'로 명명)와 동물뼈, 각종 석기 등 그 시대 생활상과 환경 생태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발굴 종료 25년이 지난 오늘 이 동굴을 새삼 떠올리는 것은 바로 이 동굴서 발견된 진달래과의 꽃가루 때문이다. 발굴 당시 이 동굴에선 3백43개의 꽃가루가 검출됐는데 유독 진달래과 꽃가루만이 굴 입구서 1백57개나 발견됐다.

진달래과는 산성토양을 좋아하는 식물이다. 그런데 왜 하필 알카리성 토양인 석회암 동굴에서, 그것도 굴입구서 꽃가루가 집중 발견된 것일까.

발굴조사자였던 충북대 이융조교수는 "그 시대 사람들이 이미 꽃의 아름다움을 알고 주거지를 꾸미기 위해 일부러 갖다놓은 미의식"이라며 "이로 보아 이들 구석기인은 세계 최초로 꽃을 생활화한, 이른바 '꽃을 사랑한 첫 사람들(the first flower people)'로 생각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 흥수아이를 포함한 두루봉 구석기인들은 큰원숭이, 쌍코뿔이, 옛코끼리, 크로쿠타, 하이에나 같은 들짐승이 우글거리는 삶의 전장 속에서도 꽃을 꺾어다 집앞을 장식하고 감상하는 심미안과 여유를 가졌던 것이다.

혹자는 웬 뜬금없는 아프리카 동물이냐고 하겠지만, 실제 발굴에서 이들 짐승뼈가 상당수 나왔다. 그만큼 그 시대엔 따뜻했고 동물상도 달랐다.

두루봉 구석기인이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란 건 아직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이 두루봉을 찾았던 것은 피난처인 동굴과 함께 인근에 금강이란 물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금강이 곧 생명수요 삶의 터전이었던 '과거의 금강 사람들'이다.

강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에 있어 중요한 요소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금강을 젖줄 삼아 삶의 뿌리를 이어가는 이 시대 이 지역 사람들 또한 '오늘의 금강 사람들'이다.

바야흐로 꽃 피는 계절 4월을 맞아 온갖 꽃들이 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벚꽃과 개나리, 목련이 피고지는가 싶더니만 시골 산자락에도 각종 제비꽃과 괴불주머니, 현호색, 양지꽃 등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진달래 역시 산 양지쪽 능선을 따라 한창 붉은 물감을 흩뿌리고 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더니 하루가 다르게 산빛이 변한다. 말 그대로 만화방창(萬化方暢)이니 화란춘성(花爛春盛)이다.

먼 옛날 두루봉 사람들이 사냥갔다 돌아오는 길에 진달래꽃을 한아름 꺾어나르던 시기도 요즘 같은 시기였으리라. 단지 기후가 다르고 생태계가 달라 당시 진달래가 어떤 종이고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할 뿐이다.

야생상태서 그날그날 의식주를 해결하느라 고단한 삶을 살았을 과거의 금강 사람들. 그러면서도 봄꽃 한아름에 환한 미소지으며 내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했을 그들. 그들이 남긴 삶의 흔적은 온 데 간 데 없는데 그 옆으론 오늘의 금강 사람들이 오염시킨 강물만 소리없이 흐르고 있다.

진달래 흐드러진 언덕너머로 요절한 흥수아이의 일그러진 잔영이 아지랑이처럼 현기증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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