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를 마치며

 
“달래강의 숨결은 살아있다”

 

개발의 대상이 아닌 ‘상생의 대상’
소중한 자원 인정하고 지켜나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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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의 숨결’은 살아있다.

 

멈춘 호흡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숨소리다. 태고적 한반도 탄생 이후부터 시작됐을 그 숨소리는 수천 수만년을 이어오는 동안 다소 박동이 깨지고 리듬을 잃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건강한 숨결을 자랑하고 있다.

 

충북 보은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해 충주시 탄금대 합수지점까지 총연장 125km를 굽이치며 흐르는 달래강(달천). 우리나라 중부권의 중요한 수원(水源)이자 젖줄인 남한강의 한 지류로서, 충북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삶의 터전으로서 고고한 물흐름은 계속되고 있고, 그 고고한 삼백리 물길 곳곳에는 예나 지금이나 고유의 숨결들이 살아 꿈틀대고 있다.

 

 

 

 

 

 

 

 

 

 

 

 

 

 

 

 

 

 

 

 

 

 

 

 

 

 

 

달래강의 숨결들./자연닷컴

 

달래강은 우선 지역민들의 소망을 안고 흐르고 있다. 크고 작은 물줄기 마다에는 어김없이 마을이 자리하고 있고 그 어귀엔 으레 서낭당이 모셔져 있다. 가는 곳마다 느티나무,팽나무,소나무 같은 신목(神木)들이 금줄이 쳐진 채 한 두 그루쯤은 예사로 서있고 그 옆엔 돌무더기나 입석(立石),장승,당집 등이 역시 오색 헝겊을 두른 채 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각종 동제(洞祭)가 동고사,서낭제,장승제,산신제 등의 형태로 여전히 치러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증표다. 각 마을마다 전해내려오는 방식과 절차는 조금씩 다를지언정 그 목적은 한결같이 마을수호와 액운퇴치,소원성취가 주를 이룬다. 동제의 규모는 예전에 비해 많이 축소되긴 했으나 마을 주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체로서 이 지역의 오랜 풍습이자 순수한 삶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달래강은 또 수많은 이야기(설화)를 안고 흐른다. 가는 곳마다 세월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숱한 지명 유래와 인물·유적 관련 이야기들이 인근 주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뿌리 박은 채 전설 혹은 민담 형태로 목소리를 토해낸다. 최상류 발원샘에서부터 최하류 탄금대까지, 발을 딛는 곳마다 멈춰 서는 곳마다 할 얘기도 많고 들을 얘기도 많다. 오죽하면 달래강 명칭 유래에 얽힌 이야기만도 ‘정설’이 없을 만큼 갖가지요 물줄기가 지나는 곳마다 속리천,박대천,청천천,가무내,괴강,달천과 같이 부르는 이름이 각기 달라지는 강이 곧 달래강이다. 


달래강 지역엔 많은 세시풍속도 전해진다. 정월 초엔 세배와 덕담나누기,윷놀이를 하고 대보름엔 부스럼깨물기와 더위팔기,오곡찰밥 제사지내기,각종 풍물놀이 등을 하고 음력 이월엔 좀생이날 행사와 영등제를 통해 풍년농사를 기원한다. 또 삼월 삼짇날엔 산멕이를 통해, 사월 초파일엔 각자 절을 찾아 정성껏 치성을 드린다. 오월 단오날엔 마을단위로 놀이굿판을 열고 칠월 칠석엔 정한수 한 그릇에 무병장수를 기원 한 후 백중날엔 호미씻이를 통해 일꾼들의 노고를 위로한다. 팔월 한가위엔 조상 찾아 성묘하고 시월 상달엔 안택굿과 시제를 통해 천지 조상께 감사하며 동짓날엔 팥죽을 쑤워 먹고 섣달 그믐날엔 촛불을 밝혀 잡귀를 몰아낸다.


지금은 이같은 세시풍속들이 많이 쇠퇴했지만 최근 다시 열리고 있는 괴산 청천의 대보름날 행사와 불정의 백중놀이 행사는 달래강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달래강은 또 역사의 현장이다. 괴산군 청천면 후영리 농소마을의 고인돌과 칠성면 도정리의 고인돌 등 선사시대 유적을 비롯해 괴산읍 검승·제월리,  감물면 지장·창산·이담리, 충주시 이류면 문주리 등 곳곳에 남아있는 고려·조선시대 유적들 역시 달래강 사람들의 옛 숨결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달래강은 또 많은 생명체들을 보듬고 흐르고 있다. 수계 대부분이 산간지역을 흐르는 계곡형의 하천이기에 다른 수계에 비해 수질이 맑고 깨끗한 데다 주변 환경 또한 쾌적해 수많은 생명체들이 뿌리를 내리고 사는 ‘윤택한 삶의 보금자리’로서 독특한 생태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다.
 

 

 

 

 

 

 

 

 

 

 

 

 

 

 

 

 

 

 

 

 

 

 

 

 

 

 

 

 

■‘상생의 해’를 떠올리자

 

달래강의 서쪽 분수령인 한남금북정맥에 해가 기울고 있다. 지난 1월초 사전 취재에 들어간 지 꼭 12개월 만에 처음으로 ‘지는 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간 삼백리 물길을 답사하면서 전혀 느껴보지 못한 석양이다.


발걸음이 무겁다. 감히 1년간의 발걸음으로, 삼백리 물길에 담긴 모든 숨결을 지면에 담고자 했던 취재팀의 당초 욕심이 문득 떠오른다. 아쉬움이 크다. 그래서 미련이 남는다.


하지만 달래강의 해는 결코 지는 해가 아니다. 떠오르는 해다. 그만큼 달래강의 숨결은 건강하다.


또 하나 분명한 게 있다. 달래강엔 마침표가 없다. 남한강과의 합수지점인 탄금대가 달래강의 종착점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니다. 시작점이다. 남한강이라는 새로운 물흐름의 시작인 것이다.


그 옛날 서해를 출발한 소금배가 한강과 남한강을 거친 후 탄금대 옆을 지나 목도나루(괴산군 불정)를 향해 새로운 출발을 했듯이 또 하나의 시작점이 바로 달래강의 종착지다.


달래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다. 충북의 젖줄이자 지역민들의 삶의 터전이다. 그 안에 지역의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고 지역민들의 어릴적 추억과 꿈, 삶의 향기가 고스란히 배 있다. 또 그 품 안에는 각종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이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고 곳곳에 아름다운 절경과 명소가 깃들어 있다.

 

이러한 달래강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이 시대에 남겨진 숙제를 과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그건 단 하나 ‘달래강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숨결의 소중함을 지역민 스스로 지켜 나가면 된다. 달래강이 단지 지역발전을 위한 ‘개발의 대상’이 아닌, ‘상생의 대상’으로서 마지막 보루가 돼야 한다.


달래강은 어느 한 지자체, 어느 한 지역의 소유물이 아니다. 유역내 각 골짜기서 흘러내린 크고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들어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유기체인 달래강을 이루고 있듯이 유역내 구성원들이 스스로 힘과 뜻을 합쳐 지키고 가꿔나갈 때만이 소중한 자원으로서의 달래강이 보전될 수 있는 것이다.


달래강은 흐르고 있다. <끝>

여울로 변한 뱃길 세월무상 절로 느껴져
80년 보은 대홍수로 마을마다 아픈 상처 
청원관내 접어들면서 박대천으로 불려져

 

상전변성해(桑田變成海), 즉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했던가.

 

속리천(달래강)을 따라 보은군 산외면 이식리로 접어든 나그네는 세월의 무상함에 발길을 멈춘다.

 

옛날 이곳을 지나던 배들이 쉬어갔다는 주식포(舟息浦)는 지금의 지명인 이식리(梨息里)로 변했고 마을앞 강물은 무릎도 채 안차는 얕은 여울로 변했으니 말 그대로 창해상전(滄海桑田)이요 능곡지변(陵谷之變:언덕과 골짜기가 서로 바뀜)임을 실감케 한다.


이식리에서 잠시 강물에 발을 담그고 사람의 인생살이와 강의 생로병사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잠겨있다 다시 이식2교를 건넌다.

 

물길은 이곳서 산외면과 내북면 경계를 지나 오른쪽 산자락을 끼고 또 한바탕 커다란 S자형을 그리며 호기를 부리는데 그 중간에 만나는 곳이 호룡소(虎龍沼)다. 산외면 이식리서 내북면 봉황리를 향해 이어진 바위산 자락이 마치 호랑이가 누워 눈을 감고 있고 능선에서는 용이 꿈틀거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그 밑을 감도는 물을 호룡소(虎龍沼)라 불렀는데 지금은 흔히 호롱소라 부르고 있다.

 

호롱소에서 호랑이 머리격인 바위 절벽 위 산봉우리는 전국에서 제일 가는 명당으로 알려진 곳인데 지금은 문화 류씨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호롱소 부근은 그 이름 만큼이나 경치 또한 절경을 이뤄 외지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명당도, 명소도 이젠 모두 예전 일이 될 판이니 이곳서도 세월무상을 또 다시 느끼게 한다.

 

최근 진행중인 내북-운암간 도로 공사로 곧 터널이 뚫릴 예정이어서 주변 자연경관이 크게 훼손될 위기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터널과 교량이 지나는 곳이 하필이면 호랑이 머리부분과 호롱소 주변이어서 인근 주민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위기의 호룡소
호랑이와 용의 형상을 한 바위산 밑으로 강물이 휘돈다 하여 이름 붙여진 호룡소는 인근 도로공사로 인해 자연경관이 크게 훼손될 위기에 놓여 있다. 한 주민이 호룡소의 내력을 설명하며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

 

강물마저 호롱소의 슬픈 사연을 아는 지 가냘픈 몸짓으로 호랑이 꼬리 부분의 산자락을 살짝 적시며 모래벌을 향한다.

 

봉황리의 중심마을인 모래벌은 이곳의 지형상 속리천이 휘돌아 흐르면서 곳곳에 모래톱을 만들어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수초로 가득 차 예전 모습과는 딴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마을 앞의 청벽산이 봉황리란 아름다운 지명과 유구한 마을 역사를 전하며 마을 상징으로 우뚝 솟아있다. 봉황리는 이곳 청벽산에 아주 오랜 옛날부터 봉황 한 쌍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됐다.


하천을 끼고 있는 속리천 유역의 마을 대부분이 지난 1980년도 보은 대홍수때 입은 수해로 뼈아픈 상처를 안고 있듯이 봉황리 모래벌 역시 당시 입은 수해로 마을 전체가 쑥대밭으로 변해 집을 다시 짓고 제방도 높이 쌓는 큰 변화를 겪었다. 현재 마을앞을 지키고 서 있는 느티나무도 당시 제방을 높이면서 밑둥치가 2m 이상 덮여져 높이가 오히려 줄어든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봉황리 모래벌 앞에는 봉황교가 세워져 있고 이 다리 남쪽으로는 달래강의 1차 지류(총 17개) 중 처음으로 만나는 흑천이 흘러든다.

 

흑천은 한남금북정맥이 지나는 보은군 내북면 법주리서 시작해 염둔·화전리를 거쳐 창리에서 동산·도원리쪽 물길과 합쳐진 후 봉황교 부근서 속리천과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흑천 합류부 지점 도로변엔 '속리산 24km'란 표지판이 서있어 이곳이 달래강 3백리 물길을 따라 발원지로부터 하류쪽으로 대략 5분의 1가량 지난 지점임을 알려주고 있다.


모래벌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면서 마주치는 곳이 청주-보은간 19번 국도가 지나는 청벽산 절벽이다. 이 청벽산 절벽에는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특이한 자연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봉황리 마을의 숨겨진 자랑거리인 '홍두깨물'이다. 이 홍두깨물은 비가 많이 올 때만 청벽산 절벽의 중간 부분 바위틈에서 약 40m 아래로 쏟아지는 장대한 폭포로서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아주 희귀한 현상이다.

 

봉황리의 상징 청벽산
보은군 내북면 봉황리는 마을앞 청벽산에 봉황 한 쌍이 살았다고 하여 이름 지어졌는데 이곳 중턱에는 비가 많이 올때만 나타나는 '홍두깨물 현상'이 마을의 자랑거리로 전해진다
.

 

봉황리 모래벌앞 느티나무는 지난 1980년 보은 대홍수 이후 제방을 높이면서 밑둥치가 2m 이상 파묻힌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청벽산 아래 봉황보에 잠시 머물렀던 물길은 보를 넘으면서 보은군 경계를 벗어나 이내 청원군 관내로 접어드는데 바로 이때부터 속리천이란 이름 대신 '박대천'이란 새 이름으로 흐르게 된다.

 

박대천은 청원군 미원면 어암리에 있는 박대소(沼)의 이름을 딴 것으로 달래강이 괴산군 청천지역에서 청천천이란 이명을 갖기 전까지 불려지게 된다.


이름이 바뀌어서일까. 청원군 미원면 운암1리서 박대천으로 불려지기 시작한 달래강은 물흐름이 훨씬 느긋해졌다.

 

들판 가운데를 흐르는 물길을 따라 인풍정교를 지나 운암교에 올라 서니 왼쪽으로 또 하나의 물길이 합류하고 있다. 두번째 1차 지류인 감천이다. 감천은 청주시 상당산 부근서 시작해 낭성면 지역서 인경천(2차 지류)과 만난 후 다시 미원면 관내를 흐르는 미원천(2차 지류)과 몸을 섞어 운암교 아래서 박대천으로 흘러든다.

 

봉황보

 

인풍정교서 바라본 박대천

 
이곳 감천 합류지점부터는 옛날 용과 신선이 살았다는 옥화9경 지역이다. 옥화9경은 달래강 본류가 통과하는 4개 시.군(보은군, 청원군, 괴산군, 충주시 등으로 지류만 지나는 음성군은 제외) 가운데 가장 짧은 구간을 지나는 청원군 관내 9곳의 절경을 일컫는 바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청원군이 '청원 관광의 간판'으로 내세우는 명소다.


그 중 옥화 1경은 달래강 본류가 아닌 감천(청주-보은간 19번 국도변 운암리) 하류에 있는 청석굴로 이곳에서는 구석기인들의 생활흔적인 찍개와 볼록날, 긁개 등이 발견된 바 있으며 굴에서는 용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감천이 합류하는 운암교에서 하류로 약 1km 가량을 내려가면 옥화2경인 용소(龍沼)가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다.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에 있는 용소는 달래강 수계 중 수심이 가장 깊어 절벽위서 내려다 보면 바닥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물빛이 검푸른 게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이 용소에는 먼 옛날 용이 살았는데 그 용이 승천할 때 지나가던 여인네가 보는 바람에 부정을 타서 그대로 떨어져 이무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절벽 면에는 용이 승천할 당시 새겨진 듯한 용의 형상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달래강의 명소 '용소(옥화2경)'
용소에는 먼 옛날 이곳에 살던 용이 승천할 때 지나가던 여인네가 보는 바람에 부정을 타서 그대로 떨어져 이무기가 됐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절벽 면에는 용이 승천할 당시 새겨진 듯한 용의 형상이 뚜렷이 남아 있어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곳곳에 절경 가는 곳마다 수채화 갤러리
달래강 유일 아치형 다리 절묘한 풍경
배 다니던 주포 이젠 전설 속 이야기
 
예년보다 이른 장마가 갈 길 먼 나그네의 발목을 잡는다.

 

후텁지근한 날씨로 온 몸이 축 늘어지는 것도 그렇지만 습기와 물안개로 카메라의 시야가 영 좋질 않다.

 

하지만 어쩌랴. 산이 있기에 산을 오르는 산사람처럼 달래강이 있기에 달래강을 찾게된 나그네도 잠시 발길을 멈추고 비가 걷히길 기다릴 뿐이다.


장마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틈을 타 다시 물길을 따라 나서니 강물이 꽤나 불었다. 이번 첫 장마는 달래강 유역엔 무척 반가운 단비다.

 

줄어든 강물과 급격한 일교차로 그간 알 낳기를 미뤄온 물고기 식구들에겐 대내림 할 기회를 준 생명의 비요, 대지가 타들어 가는 바람에 농작물이 크지 않아 걱정하던 농부들에겐 모처럼 만에 한숨 돌리고 막걸리라도 한 잔 들이키게 해준 효자 비다.


냇가를 찾아온 해오라기며 백로, 왜가리, 물총새의 날갯짓도 전에 비해 경쾌하다.

 

보은군 산외면 백석1교서 장갑리 본말을 끼고 오른쪽으로 굽이치는 물길을 따라 둑방길로 들어서니 들풀들도 생기발랄하다. 논의 벼들도, 논둑의 콩들도 이제서야 제빛을 찾았다.


자잘한 물방울이 영롱히 맺힌 메꽃을 보니 마치 머리를 감고 욕실에서 막 나온 아낙 같다. 앙증맞은 토끼풀의 수줍음에서 그 옛날 소꿉친구들의 얼굴이 오버랩되어 스쳐 지나간다.


장갑교를 지나 원평리 관광휴양지를 향해 들어서자 삼부평교 아래로 자연하천이 옛 모습 그대로다. 달뿌리풀이 군락을 이룬 사이사이로 물길이 트이고 물머리는 가볍게 꼬리치며 여울진다. 여울이 끝날 즈음에서 먹이잡이에 여념없던 흰뺨검둥오리 가족이 나그네의 발길에 놀라 재빨리 풀숲으로 숨어든다. 어미 뒤를 따르는 새끼오리들의 모습이 술래에게 들킨 어린아이처럼 허겁지겁이다. 


여울이 끝난 하천 저 편엔 수십길 낭떠러지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살짝 튼 하천 폭은 몇 배로 넓어진다. 이곳이 원평 관광휴양지다. 큰 돌로 다시 쌓은 제방과 아직도 굴삭기의 이빨 자국이 선명한 하천바닥에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 조금 전의 자연하천 모습과는 판이하다.


하지만 그런 인상은 잠시뿐 휴양지 아래 마을 초입으로 눈길을 돌리니 별천지다. 달래강 유일의 아치형 다리인 상원평교가 인근 경치와 어울어져 멋진 수채화 전시회를 열고 있다.

 

자연의 미와 인공의 미가 만나 어쩜 저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기막힌 절경이다. 다리의 위·아래, 좌·우 어디서 보아도 절묘하긴 마찬가지다.

 

도심의 그 어떤 갤러리에서 이처럼 멋진 그림을 만날 수 있을까.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보이는 풍경은 말 그대로 극치다.


그림 감상에 젖어 넋 나간 듯 카메라 셔터 누르길 두어 시간. 그러고도 미련이 남아 마지막으로 두 세컷 더 찍는다고 절벽 쪽으로 가서 물가의 바위 위로 건너뛴다는 게 아뿔사 독사가 일광욕을 하고 있는 곳 바로 옆이 아닌가. 화들짝 놀라 한 1미터 가량을 껑충 뛰니 독사도 덩달아 물로 뛴다. 독사가 얼마나 놀랐으면 물로 투신하듯 뛰어들었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쓴 웃음으로 진정시키고는 서둘러 발길을 돌리려는데 설익은 개암이 낯익은 얼굴로 나 좀 보란다.

 

마치 수채화 전시회 하듯...
달래강 유일의 아치형 다리인 상원평교가 인근 경치와 어울어져 멋진 수채화 전시회를 열고 있다. 자연의 미와 인공의 미가 만나 탄생시킨 한 폭의 수채화가 감탄사를 연발케 한다. 도심속의 그 어떤 갤러리에서 이처럼 멋진 그림을 만날 수 있을까.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보이는 풍경은 말 그대로 극치다.


원평리 마을을 막 벗어날 즈음 길 옆으로 담배밭이 사열하듯 넓다랗게 펼쳐진다. 중간 중간 피어있는 담배꽃이 반가워 오랜만에 밭고랑으로 접어드는데 끈적끈적한 담뱃진이 잊혀졌던 옛 향수를 부추기며 묻어나온다. 아, 담배향. 그리고 땀냄새. 어릴 적 고향 냄새다. 속리천이 지나는 보은군 산외면 지역에서는 아직도 잎담배 농사가 많이 이뤄지고 대추,사과,고추 농가도 많다.


속리산 상판리에서 산외면 오대리로 이어지는 도로변엔 살구나무가 가로수로 심겨있다. 아직은 덜 익은 푸른 살구가 입안에 잔뜩 침을 고이게 한다. 신침을 몇 모금 삼키며 도착한 오대 마을 입구에 마을 유래비가 서있고 그 옆으로 오대교가 반긴다. 오대교 밑으론 자연하천이 잘 보존된 채 산대리를 향해 줄달음 치며 길게 늘어선다.


이어 만나는 산대리는 '산 속에 터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4백여년 전 능성 구씨가 정자를 짓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하는데 현재 마을 입구엔 4백년 된 느티나무와 정자각, 마을유래비가 두 장승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다.


오대 마을 아래의 길탕리는 길골과 탕골이 합쳐진 마을로 속리천(달래강)이 동네 앞을 역S자형으로 굽이치며 또 다시 멋진 장관을 연출한다. 특히 길탕교 부근은 바위로 된 인근 산자락을 강물이 오랜 세월 깎아내려 커다란 소를 이루는데 맑고 푸른 강물속에 마치 기와장을 옆으로 세워놓은 듯한 강바닥이 무척 인상적이다.


산 허리를 잘라 다릿발을 세운 길탕교 위로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산 위 송신탑에 지어진 까치집에서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꽤꽤꽤꽥 딱다닥딱' 날카롭게 이어지는 소리가 영락없는 파랑새 소리다. 희망을 상징하는 새이지만 애써 집 짓지 않고 빈 까치둥지 골라 주로 새끼 까고 텃새가 심해 다른 새나 사람이 둥지 가까이 지나가기만 해도 독특한 경계음을 내며 달려드는 심통많은 새다.

 

 길탕리 물굽이
보은군 산외면 길탕교 부근은 바위로 된 인근 산자락을 강물이 오랜 세월 깎아내려 커다란 소를 이루는데 맑고 푸른 강물속에 마치 기와장을 옆으로 세워놓은 듯한 강바닥이 무척 인상적이다.


벼락같은 파랑새 소리를 뒤로 하고 고개를 넘어서니 중티리다. 마을회관 앞을 지나 왼쪽으로 접어들자 하천변에 보은-내북간 도로 공사장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굴다리를 건너 중티교에 올라서자 길탕리에서 한바탕 휘돌아 흘러내려온 속리천이 먼저 와있다. 중티교를 지난 속리천은 잔 여울을 이루며 이식보(洑)로 흘러들어 큰 물길을 이룬다. 이식보는 오래전부터 인근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대주는 젖줄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내린 비로 물이 불어 흘러넘치면서 멋진 광경을 재연한다.


둑방길을 빠져나와 이식삼거리를 지나니 이식마을이 코 앞이다. 이식리(梨息里)의 옛 지명은 주식포(舟息浦) 혹은 주포(舟浦)였는데 예전 배가 다니던 시절 배가 쉬어가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지금의 물길을 바라보며 이곳으로 배가 다녔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믿기질 않는다.

 

   <엉겅퀴>

 

  <개암>

 

  <잎담배>

 달래강 변엔 절경 뿐만 아니라 옛 고향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숱한 추억거리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산자락이 품을 연 곳으로 속리천은 흐르고

최상류 대부분 전형적인 산골 풍경 멋진 풍경

일부구간 하천정비사업으로 점차 옛 모습 잃어


산경표의 원리에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란 말이 있다. 산은 스스로 물을 나눈다는 뜻이니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뜻과도 같다.


또 산경표에서는 두 능선 사이에 반드시 계곡이 있고 두 계곡 사이에는 반드시 능선이 있다고 본다. 또한 물길은 능선보다 낮은 곳에서 시작해 서로 끊기지 않고 이어져 흐르니 산 없이 시작되는 강이 없고 강을 품지 않은 산이 없어 결국 산과 강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 흘러온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룬 뒤 바다로 흘러가듯 이 산 저 산줄기가 모여 정간과 대간으로 흘러들고 마침내 백두산으로 향하니 이 모든 것이 한반도의 산과 강을 이룬다는 것이다.


옛 선조들의 기막힌 논리를 생각하며 눈앞에 펼쳐진 속리산 자락을 보니 옛말이 틀림없다.

 

속세를 잠시 떠났던 속리산 자락이 넉넉한 품을 이제 막 열기 시작하는 곳으로 속리천(달래강 최상류) 물머리가 삐죽이 내밀고 그 바로 옆으로 '국민소나무' 정이품송이 600년 전설의 모습으로 우뚝 서있다.


숱하게 속리산을 드나들었어도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다.

 

물길에 서서 물과 산의 개념으로 바라보니 더욱더 새롭다. 본류(남한강)랑 만나는 곳이 북쪽이니 좀더 빠른 그쪽을 향해 물길을 틔울 법도 한데 정반대 방향인 남쪽을 향해 점잖게 머리를 틀고 있으니 이 또한 속리산의 매력이자 달래강의 멋이 아닌가 싶다.


천변에 자란 달뿌리풀이 한 길 가량 자라있다. 사내리 집단지구시설에서 처음으로 '인간냄새'를 맡으면서 BOD를 품었다고는 하나 물빛이 아직은 꽤나 맑은 표정이다. 물가엔 검은 듯 푸른 모습의 물잠자리 떼가 산란기를 맞아 사랑을 나누느라 정신없이 오가고 둑방에는 앙증맞은 엉겅퀴가 망울을 터트린 채 바람에 하늘거린다.

 

인근 도로로 관광객이 수없이 드나들며 도시내음을 전해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전형적인 산골 풍경이다.

 

속리천과 정이품송
속세를 잠시 떠났던 속리산 자락이 넉넉한 품을 이제 막 열기 시작하는 곳으로 속리천 물머리가 삐죽이 내밀고 그 바로 옆으로 '국민소나무' 정이품송이 600년 전설의 모습으로 우뚝 서있다. 숱하게 속리산을 드나들었어도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다.


다시 물길을 타고 상판교를 지나 중판리 쪽을 향하니 말티고개 쪽 골짜기서 내려오는 실개천과 만난다.

말티고개 정상은 익히 알려진 대로 천왕봉서 시작한 한남금북정맥의 마루금이다. 고개 너머는 금강수계요 속리산 쪽은 속리천(달래강·남한강) 수계다.


이 지점부터 한동안은 왼쪽으로 한남금북정맥 능선을 두고 흐른다. 따라서 인근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빗물은 그대로 속리천의 몸이 된다.


하천이 한바탕 휘도는 곳으로 둑방길을 따라 들어가니 중판리 점말교가 나타난다. 다리위에 서서 물이 흘러드는 위쪽을 바라보니 물길이 가냘프다.

 

봄부터 계속되는 가뭄으로 하천물이 바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점말교 바로 아래에 최근 '무전원자동수문'이 세워져 물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훨씬 많아졌지만 이곳 역시 텅 비어 있다. 올들어 한 차례, 그것도 개나리꽃 필 무렵에 단 한번 물이 넘치고 말았으니 가뭄정도가 어떤지 상상이 가리라.


이 자동수문은 보은군청 이호천담당(경제사업단 특허개발담당)이 직접 개발한 것으로 수질과 수량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최신형 수문이다. 보은군청은 앞으로 이 자동수문을 속리천 곳곳에 더 설치해 연중 맑은 물이 흐르도록 한다는 방침이어서 그 효과가 기대된다.

 

 

무전원자동수문
봄부터 계속되는 가뭄으로 현재 속리천은 바닥을 보이고 있다. 오죽하면 중판리 자동수문으로 올들어 한 차례, 그것도 개나리꽃 필 무렵에 단 한번 물이 넘치고 말았으니 가뭄정도가 어떤지 상상이 가리라. 물이 넘칠 때의 모습(위)과 현재 모습(아래).

 

중판리 자동수문 아래에는 30년전(1979년) 건설된 '희망의 다리'가 고목처럼 누워있다.

 

인근에 속리터널이 뚫리면서 교통량이 많아지자 바로 아래에 중판교가 신설돼 다리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그런 탓인지 다리 입구에 새겨진 희망의 다리란 이름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인다.

 

보은군과 대한석유공사가 이 다리를 건설할 당시만 해도 이 지역 주민들에게 '밖의 세계로 통하는 희망'을 주기 위해 야심찬 이름을 붙였으련만 세월이 흐르면서 퇴물로 전락한 채 피서객들의 주차장과 그늘막 역할을 할 뿐이다.

 

속리천도 세월처럼 그렇게 흘렀으리라. 뒤에서 밀려오면 밀려오는 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채지 않고 미련없이 낮은 곳만을 향해 줄달음 쳤으리라.


잠시 세월무상에 젖었다 발길을 돌리려니 새로 들어선 중판교 초입에 낯익은 돌탑이 금줄을 두르고 서있다. 동네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었단다. 자연을 아는 순수한 사람들의 마음이다.

 

물길을 따라내려가다 속리산면의 하수처리상황은 어떨까 궁금해 하천옆(중판리)에 세워진 속리하수처리장을 잠깐 들렀다. 보은군이 지난 2003년부터 한국수자원공사에 위탁해 관리운영해 오고 있는 이 하수처리장은 하루 처리용량 4천톤 규모로 인근의 상판·중판·사내·갈목리 일원 하수를 총13km의 차집관거를 통해 걸러내고 있다. 방류구를 살펴보니 비교적 맑은 물이 속리천으로 흘러들고 있다.


다시 도로로 나와 속리터널 앞을 거쳐 하류로 향하니 오른쪽으로 문화마을(중판2리)이 보일 쯤 하판교가 나타난다. 물길은 계속해서 왼편에 한남금북 마루금을 끼고 도로와 평행으로 달린다.


'샨띠와남'이란 독특한 이름의 요가수련원을 지나니 북암리와 마주친다. 마을 앞 세강교 아래엔 수령 3백년 된 느티나무가 마을 역사를 대변하듯 마을간판처럼 서있고 왼쪽 수백m 위쪽으로 하천변 바위 절벽과 조화롭게 자란 소나무가 고풍스런 자태로 객을 반긴다.


37번 국도를 따라 산모퉁이를 한바퀴 휘돌고나니 백현리 마을이다. 백현교로 들어서자 다리 아래 개울가 모습이 지금까지 보여온 자연하천의 모습과 확연히 다른 게 어색해 보인다. 최근에 마친 하상정비 사업으로 둑방엔 철망이 깔리고 하천바닥은 편평하게 다듬어져 '죽은 느낌'을 주고 있다.

 

 

속리천과 한남금북정맥의 멋진 만남
37번 국도를 따라 보은군 속리산면과 산외면 경계를 지나니 잠시 뒤 백석2교가 쉬어가라고 객을 부른다. 다리 건너 왼쪽 빈터로 들어서자 한폭의 동양화가 수면위에 떠있다. 한남금북정맥의 능선이 인근 농경지와 어울어져 물위에 비친 게 여간 멋진 게 아니다.

 

또 한바탕 휘도는 산모퉁이 중간에 속리산면과 산외면 경계가 있고 이어 나타나는 백석2교가 잠시 쉬어가란다. 다리 건너 왼쪽 빈터로 들어서자 한폭의 동양화가 수면위에 떠있다. 한남금북정맥의 능선이 인근 농경지와 어울어져 물위에 비친 게 여간 멋진 게 아니다. 지는 석양이 아쉬워 발길을 돌리니 백석1교가 지난 겨울의 모습을 떠올린다. 찬 바람이 불던 늦겨울 예비탐사차 이곳을 찾았을 때와 물빛이 확연히 다른 게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계속>

"천왕봉서 물머리 일으켜 3백리 물길 시작" 
실질적인 시작점은 백두대간 마루금
'속리천'이란 이명으로 최상류 흘러

 

 

■달래강 물길의 시작점


달래강 물길은 그동안 속리산 비로봉 아래 상고암 약수로부터 시작된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번 탐사 결과 달래강의 제1 발원지는 천왕봉 아래의 봉수대터 샘물임이 새롭게 밝혀짐에 따라 달래강 3백리 물길은 바로 이 샘물로부터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물론 실질적인 물흐름이야 천왕봉서 문장대를 잇는 백두대간 마루금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지만 학계서 인정하는 강의 시작점은 '하구 또는 합류지점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샘물 형태의 물뿌리(水源)'이기에 천왕봉 봉수대터 샘물이 진정한 '달래강의 시작점'인 것이다.


다만 이번에 함께 찾아진 비로봉 남쪽사면의 굿당터 샘물(제2 발원지-상환암과 천왕봉을 잇는 등산로변 바위굴 샘물)과 기존의 발원지로 알려진 상고암 약수(제3 발원지)도 달래강의 주요 시작점으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들 발원 샘물들은 각기 몸을 일으켜 법주사쪽 골짜기로 흘러들면서 달래강의 최상류 수역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 천왕봉의 봉수대터 샘물은 서북방향으로 물흐름을 시작해 산의 중허리 쯤에서 제2 발원샘인 굿당터 샘물과 몸을 섞은 다음 이내 상환암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다가 잠시 은폭동 폭포서 몸을 떨군 다음 비로산장 아래 삼거리(등산로를 따라 경업대·상고암 방면과 상환암·천왕봉 방면으로 나눠지는 갈림길)서 비로산장쪽으로부터 흘러오는 물길과 하나가 된다.

 

발원 샘물의 합수
천왕봉과 비로봉에서 각기 발원한 달래강 물머리는 비로산장 아래 삼거리(천왕봉·상환암쪽 등산로 입구)에서 서로 만나 비로소 하나의 물줄기를 이룬다. 왼쪽이 상고암·경업대쪽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 오른쪽이 비로봉 남쪽사면과 천왕봉·상환암쪽서 내려오는 물줄기.


비로산장쪽의 물길이란 다름 아닌 상고암 약수로부터 시작한 물줄기와 경업대·입석대쪽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상고암 입구 삼거리(경업대 방면과 상고암 방면의 갈림길)서 만나 비로산장을 거쳐 내려오는 물길을 말한다.


이들 주요 발원지 물길의 특징은 처음엔 석간수 형태의 샘물을 이루다가 샘물 밖을 벗어나 물흐름을 시작하면 다시 돌과 바위틈으로 스며들어 모습을 감췄다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길 수십 차례씩 반복하면서 앞서 말한 합류점(비로산장 상·하부)에 와서야 비로소 계곡수 형태를 띤다는 점이다.


이들 물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갑자기 물은 보이지 않고 돌과 바위 밑으로 졸졸거리며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 이른바 건천지역이 유난히 많다. 그러다가도 여름철 장마 기간이 돼 유수량이 많아지면 물길이 겉으로 드러나 크고 작은 폭포와 급류를 이루는 등 새하얀 물줄기가 온 골짜기를 떠들썩하게 만든다.


비로산장 아래부터 제법 계곡수 형태를 띠기 시작한 달래강 물길은 다시 세심정 부근서 문장대쪽 물줄기와 합쳐지면서 몸집을 불린 뒤 조선 세조대왕이 피부병을 고쳤다는 목욕소를 지나 태평교 밑에서 사내저수지로 흘러든다.


사내저수지는 달래강이 속리산서 물머리를 일으킨 후 미처 산자락을 벗어나기 전에 만나는 첫 인공 구조물로서 인근 법주사를 비롯한 속리산면 일대의 주요 상수원 역할을 하고 있다.


보은군이 관리하는 사내저수지 상수원은 자연유하식 식수전용댐으로서 총 14만2,500톤의 저수용량을 갖고 있다. 보은군은 이곳 상수원을 통해 모두 485가구 1,759명의 주민들에게 하루 1,238톤의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보은군은 지난 1988년부터 사내저수지를 포함한 속리산 자연환경보전지역내 계곡들을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발원지에서 사내저수지까지
달래강은 처음엔 석간수 형태의 샘물을 이루다가 샘물을 떠나 물흐름을 시작하면 다시 돌과 바위틈으로 스며들어 모습을 감췄다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길 수십 차례 반복하면서 비로산장과 세심정 부근에 와서야 비로소 계곡수 형태를 띤다. 세심정 부근서 문장대쪽 물줄기와 합쳐진 달래강 물길은 목욕소를 지나 태평교 밑에서 사내저수지(맨 오른쪽)로 흘러든다.

 

■속리천의 이름으로


사내저수지를 지난 물길은 법주사 바로 앞에서 동암쪽 계곡수와 만나면서 '속리천'이란 이름으로 사내리를 향해 물머리를 남쪽으로 튼다. 속리천은 달래강 물길이 발원지로부터 흘러내려 오면서 처음으로 얻게되는 '법정 하천(지방 2급 하천)으로서의 명칭'이다. 따라서 이곳부터는 계곡수 형태를 벗어나 비로소 '자연하천'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고 수량도 많아진다.


속리천이란 이름은 달래강이 하류로 내려가면서 구간에 따라 달리 불려지는 여러 이명(異名) 중의 하나로, 물길이 청원군 미원면 관내로 접어들어 '박대천'이란 이름으로 불려지기 전까지의 명칭이다.

 

속리천이란 이름으로
사내저수지를 지난 물길은 법주사 바로 앞에서 동암쪽 계곡수와 만나면서 '속리천'이란 이름으로 사내리를 향해 물머리를 튼다.


법주사를 지난 물길은 다시 야영장 부근서 남산쪽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물길과 합류한 후 사내리 집단시설지구(상가지역)와 법주사를 잇는 다리를 지나 하천내에 설치된 분수대서 잠시 몸을 풀어헤친 뒤 묘봉쪽서 내려온 물길과 합쳐져 정이품송을 향해 줄달음질 친다.


법주사에서 사내리 집단시설지구까지 흐르는 동안 달래강 물길은 처음으로 '인간냄새'를 맡으면서 물빛도 달라지고 수질도 드디어 'BOD'를 띠기 시작한다.


상가지역 건너편 사낙골을 지나 대형버스 주차장을 옆으로 끼고 산모퉁이를 도니 이내 '국민 소나무' 정이품송이 600여년의 전설을 머리에 인 채 물길을 반긴다.

 

하지만 우산을 펼쳐 놓은 듯 말끔하던 예전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태풍에 잘려져 나간 상처를 허공에 떠 받들고 누런 솔잎에다 흉칙한 철기둥을 버팀목 삼아 근근이 서 있는 게 여간 측은해 보이는 게 아니다.

 

현재의 병색도 병색이거니와 그 병색을 더욱 짙게 만든 것이 다름아닌  인근 하천의 습기, 즉 달래강(속리천) 물길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안쓰럽다.

 

바로 옆으로 도로 공사를 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뿌리를 흙으로 깊게 덮는 바람에 물빠짐이 불리해져 화근이 된 데다 인근 하천에서는 끊임없이 수분을 과잉공급해 물과는 상극인 소나무 건강이 더욱 악화된 것이다. 유일한 '벼슬나무'이기에 수시로 링거주사를 맞는 호강(?)을 누리고는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병색이 짙어지는 것을 보면 그 명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달래나 보지…" 슬픈 남매 사연 담은 설화 대표적
물맛 좋아 달천(甘川), 수달 많이 살아 수달천(獺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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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달천)은 사연이 참 많다. 특히 명칭 유래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와 기록이 전한다.

 

우선 충주를 중심으로 널리 알려진 달래강 설화부터 들어보자.


"먼 옛날 친남매가 길을 가다 소나기를 만났다. 때는 여름인지라 앞서가던 누나의 얇은 옷이 비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뒤따라가던 남동생은 어쩔 수 없이 누나의 드러난 몸을 보게�고, 순간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심성이 착했던 남동생은 자신이 엉뚱한 생각을 한 게 죄스러워 그만 돌로 아랫도리를 쳐 죽고 말았다.
한참 뒤 남동생이 따라 오지않는 것을 안 누나가 이상히 여겨 되돌아가보니 아뿔사, 동생이 아랫도리에 피를 흘리며 죽어있지 않은가. 이를 본 누나는 그제서야 전후사정을 알아채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하는 말이 '차라리 달래나 보지, 말이나 해 보지…' 그랬다는 것이다."


이같은 슬픈 얘기가 전해지면서 그때부터 달래강이란 이름이 생겼고 누나가 동생을 끌어안고 통곡한 곳은 달래고개라 불렀다 한다.

 

다음은 달천에 관한 유래다.


때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게 됐는데 이 때 이여송이 명군의 장수로 들어오게 됐다. 이여송의 아버지(이성량)는 본래 조선사람이었으나 철령위로 도망가 살았기에 이여송 역시 근본이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망각한 채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며 중요한 혈을 끊는 등 만행을 일삼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여송 휘하의 한 장수가 충주지역을 지나다 갈증이 나자 맑게 흐르는 강물을 마셨는데 그 물맛이 달고 좋아 감천(甘川)이라 한 것이 훗날 달천으로 변했다고 한다.


물맛이 달고 맛있다는 뜻의 또다른 이명으로는 단냇물, 달냇물 등이 있으며, 충주 인근의 달천동,단월동,단호사와 같이 '달' 혹은 '단'자가 들어간  지명은 한자어에 상관없이 모두 '단 물맛'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또 일설에는 동국여지승람에 달천(獺川)으로 표기돼 있는 점을 들어 본래 이 강에는 예부터 수달(獺)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수달내라는 뜻의 달천(獺川)으로 불리다가 후에 '달' 자가 채음돼 달래강(達川)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달래강 인근에서는 조선초부터 수달피가 진상됐다는 얘기가 전한다.


달천과 관련된 다른 기록으로는 이중한의 택리지에 '속리산 정상에서 동으로는 낙동강, 서로는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며 북으로는 충주의 달천(達川)이 되어 한강으로 흘러든다'고 적혀있다. 또 조선시대 동람도에는 충주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산천,덕천,달천(獺川)으로 각각 표기하고 있어 당시에도 달천이란 이름과 함께 여러 명칭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덕을 입은 강, 즉 덕천(德川)이란 이명도 전한다. 조선시대 벌미란 마을의 한 사내가 자신의 집으로 탁발 온 스님의 권유에 따라 달천에 징검다리를 놓았는데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병자(病者)가 다리 덕에 목숨을 건지게 되자 그 병자를 업고왔던 노인이 '과연 덕을 입은 강이로구나(於是 彼德之川也)' 한 것이 전해져 덕천이란 이름이 생겼다 한다.

 

달래강은 지금도 지역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최상류인 보은 속리산지역에선 속리천, 청원 금관~어암리 부근에선 박대천, 괴산 청천부근에선 청천강 혹은 가무내(현천), 괴산읍 부근에선 괴강(槐江) 등으로 불리다가 충주시 달천동에 이르러서야 달래강이 된다.


속리천은 발원지인 속리산에서 이름을 따왔고 박대천은 인근 어암리(충북 청원군 미원면)의 박대소(沼)에서 유래됐으며, 청천강은 괴산 청천지역을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청천지역, 특히 화양동 부근에서 불리는 가무내는 '검은 내(현천.玄川)'란 뜻으로 인근 강바닥이 검은 바위와 돌로 돼 있어 물이 검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괴강은 괴산지역 주민들이 특히 달래강을 대신해 부르는 이름으로 괴산(槐山)의 '괴(槐)' 자를 따왔다.

 

 

�달래강의 다른 이름 '박대천'
달래강은 지금도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최상류인 속리산 부근에선 속리천, 청원 미원 부근에선 박대천, 괴산 청천부근에선 청천강 혹은 가무내(현천), 괴산읍 부근에선 괴강(槐江) 등으로 불린다.

< 청천천의 겨울>

 

 <가무내(현천)의 봄 전경>

 

<속리천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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