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도 밤나무/양반동네 상나무/오줌싸고 쉬나무/방귀뽕뽕 뽕나무/대끼이놈 대나무/화가나도 참나무…"
며칠전 속리산에 올랐다가 산중턱의 뽕나무를 보면서 문득 떠오른 구전동요다.

정확한 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릴적 입이 닳도록 주절거린 때문인지 노랫가락은 아직도 생생하다.
더욱이 오디가 익을 때면 친구들과 어울려 입과 손이 까맣도록 오디를 따먹고는 연신 나오는 방귀를 이 노랫가락에 맞춰 뿜어대면서 '방귀 뽕뽕 뽕나무' 부분을 더 크게 외치며 깔깔거리던 일이 생각나 똥끝이 찌릿하다.

하기사 오디를 많이 먹으면 방귀가 잘 나와 방귀나무란 뜻의 뽕나무가 됐다는 속설은 훨씬 뒤에 알았지만 어쨋거나 어릴적 오디를 많이 먹으면 신기하게도 방귀가 잦았던 건 사실이다.
또 그땐 왜 그렇게 뽕나무에 백랍이 많았던지 뽕밭에 들어가면 하얀 거미줄 같은 분비물이 머리와 옷에 잔뜩 달라붙어 온몸이 끈적거리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백랍의 실체 역시 나무 수액을 빨아먹는 일종의 나무이(뽕나무이)란 사실을 안 것도 머리통이 크고 난 뒤이지만 지금도 백랍을 뒤집어썼던 그때 모습을 생각하면 온몸이 스믈거려 움찔해진다.
밭 오디는 이미 다 지고 산 오디만 자잘하게 남은 요즘 웬 뜬금없는 뽕나무 타령인가 하면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이 자꾸만 '상구지계(桑龜之戒)의 교훈'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옛날 바닷가에 노모를 모시고 사는 어부가 있었다. 어느날 바다에 나가 그물을 거두는데 그날따라 무엇이 잡혔는지 쉽게 딸려오질 않았다. 한참 동안 씨름한 끝에 간신히 그물을 끌어올리니 난생 처음 보는 커다란 거북이였다.
처음엔 두려워 놓아줄까 생각했지만 노쇠한 어머니를 위해 삶아드리는 게 좋겠다 싶어 지게에 지고 집으로 가 솥에다 불을 지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불을 아무리 때도 거북이는 삶아지지 않고 살아움직였다.
생각 끝에 놓아주기로 하고 다시 지게에 지고 바다로 가던 중 언덕에서 쉬게 됐다. 하루종일 거북이와 씨름한 탓에 하도 피곤해 잠시 눕는다는 것이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한참을 자는데 뽕나무가 꿈에 나타나 "거북이는 뽕나무로 삶아야 잘 삶아지는데 그것도 모르느냐"며 이내 사라지는 게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든 어부는 마지막으로 뽕나무가 일러준 대로 해보기로 하고 옆에 있던 뽕나무를 베어 집으로 가 거북이를 다시 삶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조금전까지 삶아지지 않던 거북이가 흐물흐물 잘도 삶아지는 게 아닌가. 결국 뽕나무 덕에 아들은 효도하고 노모는 거북이를 먹고 원기를 되찾아 오래 살았다'는 이 우화에서 상구지계(桑龜之戒)란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뽕나무가 서로에게 불리한 약점만 일러주지 않았어도 거북이도 살고 자신도 살았을 터인데 그만 그 비밀을 말한 바람에 거북이는 물론 자신도 죽게됐다는 이 우화는 자신의 처지는 망각한 채 상대방의 처지와 약점만 드러낼 경우 결국 둘 다 화를 입게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어떤가.

민생은 절망의 늪을 마냥 헤매는데 양극으로 갈라진 목소리는 연일 상대방 비난에만 열 올리며 밖으로 겉돌고 있다.

사회통합,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할 국회는 있는 둥 마는 둥 제 할 일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고 정부 역시 매번 큰 실망만 안기고 있다.

우리 사회에 상생의 길, 화합의 길은 있기나 한 것인지 도무지 끝간 곳 없이 양끝을 향해 치닫기만 한다.

갈수록 깊어지는 사회의 골을 바라보면서 이러다가 우리 모두 상구지계의 뽕나무와 거북이가 되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대끼이놈 대나무/화가나도 참나무"

꼭 우리사회를 향해 던지는 화두같아 섬뜩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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