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선 충주환경련대표에게 듣다

 
“주민과 함께 개발·보전방안 협의하고 추진해야”
   -주민부터 주인의식 같고 다함께 참여해야 
  충북도가 나서서 ‘유역회의’ 구성 바람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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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젖줄이자 지역민들의 삶의 터전인 달래강 물줄기는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또 삼백리 물길이 품고 있는 각종 생명과 문화 등 이른바 ‘달래강의 숨결’은 어떻게 지켜나가고 보전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인가.

 

달래강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니다. 그 안에는 지역의 문화가 전통과 현대라는 이름으로 살아 숨쉬고 있고 지역민들의 어릴적 추억과 꿈, 삶의 향기가 짙게 배 있다. 또 그 품 안에는 각종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이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고 곳곳에 아름다운 절경과 명소를 빚어놓고 있다. 유역내 각 골짜기서 흘러내린 크고 작은 물줄기들, 그 물줄기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는 달래강, 그 물줄기에 내재된 숨결들은 달래강만이 지닌 고유의 가치를 한층 값지게 하고 있다.

 

달래강에 대한 기획시리즈를 마감하면서, 그동안 20년 가까이 ‘달래강 지킴이’ 역할을 해온 박일선 충주환경운동연합 대표로부터 달래강에 얽힌 이야기와 보호 보전방안 등을 들어봤다.

 

 

괴산호 전경./자연닷컴

“한 마디로 달래강은 충청북도라는 공동체 인식을 형성시키고 이어주는 ‘끈 같은 강’이다.

 

보은에서 시작해 청원,괴산,음성,충주지역으로 흘러 내리는, 그러면서 충북의 남부와 중부, 북부를 연결해 주는 충북의 상징이기도 하다.

 

달래강은 또 보은과 청원,괴산,충주시민의 생명수이기도 하다.”

 

박일선 충주환경련 대표는 달래강이 갖는 지역적 의미에 대해 이같이 말하고 “충북 도민에게는 어머니와 누이 같은 강”이라고 강조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달래강에 가서 올갱이(다슬기)와 조개를 잡고 불거지(피라미)와 모래무지를 잡으며 커왔다”는 박대표는 달래강 지키기에 발 벗고 나서게 된 계기에 대해 “1990년대 초반부터 충주시민의 상수원인 달래강을 지키는 캠페인을 벌이면서 달래강 운동에 첫발을 들여놓았다”고 밝혔다.

 

 

박일선 충주환경련 대표.자연닷컴
 

△그동안 달래강 상류 쪽의 문장대·용화지구 온천개발 및 집단시설지구 저지를 비롯해 달천댐 건설 저지, 대운하 건설 저지 등 달래강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는데 이들 활동과 관련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과 아쉬웠던 일은.

-충주 수주 팔봉에서 향산에 이르는 군도(郡道)사업에 의해 인근 절경이 복원 불가능하게 훼손된 일이다. 이 도로는 전혀 필요 없는 혈세낭비 사업이었고 이로 인해 수달 서식지와 팔봉 일대의 아름다운 모래언덕이 사라졌다.

 

또 문장대·용화지구에 삽질을 하기 전 미리 막을 수 있었다면 아름답고 소중한 속리산의 작은 봉우리들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미련이 남아 있다. 싱그런 숲은 사라지고 황무지에 잡초만 듬성듬성 나 있는 온천 및 집단시설지구 개발예정지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 일과 관련해 지역사회, 정부부처 등에 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지역의 자연 환경은 지역주민이 주인이라는 인식이다. 주인이 주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때만이 내 고장 내 지역의 자연 환경을 지킬 수 있다. 주인 역할을 포기하면 내 고장, 내 고향을 지킬 수 없다.

 

정부와 지자체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지역민이 주인이라 하지만 한낱 통치의 대상으로 밖에 보지 않고 있다. 개발 문제와 관련해서도 그렇다. 지역민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자세가 매우 부족하다. 권력을 위임한 당사자들을 업신 여기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일이다.

 

△그동안의 개발 계획 등으로 인한 지역간 갈등이 아직 해소되지 않고 있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특히 달천댐 문제로 괴산지역이 많은 갈등을 겪어왔다. 잊을 만하면 불거져 나오는 댐건설 계획이 지역민들을 매번 피곤하게 하고 있고 실망감을 안겨 주고 있다. 돈과 애향(愛鄕)이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새만금 사업에서도 봤지만 대부분 국책사업의 희생자는 지역민이다. 대대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오던 한 동네에서 삿대질을 하며 싸우는 관계가 되고 있다. 지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 외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고 본다.

 

또 한 가지 각종 개발계획과 관련해 아쉬운 것이 있다면 온천법, 댐관련 법, 환경영향평가법 등 법 개정이 필요하다. 시민의식의 전환, 가치관의 전환도 필요하다. 시민단체에 구체적으로 참여해 활동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개인이 개발계획 등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달래강 수계 전체의 생태적·자연환경적 가치는.
-알 수 없고 단언 할 수도 없다. 지금까지 정확한 조사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가치를 뭐라 표현할 없다. 다만 이번 충청타임즈의 기획취재로  대략적인 윤곽이 드러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충청타임즈 보도로 지역 이슈화 됐던 ‘괴산호 생태’와 관련해서도 그간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지금의 소감과 괴산군 등 관련 기관에 하고 싶은 말은. 또 괴산호 생태는 앞으로 어떻게 관리 보호돼야 하는지.
-아쉬움이 많다. 아직도 환경보전하자고 외치면 무조건 개발을 반대하는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자연자원을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달래강과 괴산호는 괴산 주민들만의 것이 아니다. 괴산에 거주하지 않아도 괴산을 위해 얼마든지 좋은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개발주체나 괴산군이 마련해야 한다.

 

그 동안의 과정에서 괴산군수와의 간담회를 통해 오해가 해소되고 생태조사에 대한 의지를 밝힌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다. 하지만 당시 괴산군수의 의지가 어떻게 사업에 반영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시 강조하건대 개발주체나 지자체는 앞으로 계속해서 열린 마음, 열린 마인드로 지역 환경단체 혹은 언론과 괴산호의 효과적인 관리 및 개발에 대해 동반자적인 관계를 가지고 논의하고 협조해야 한다고 본다. 괴산호는 개발할 곳과 철저히 보전되어야 할 곳이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주민들을 위한 이번 사업이 지금과 같은 생각과 개발방법으론 성공하기 힘들다.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큰 틀에서 달래강은 어떻게 보호하고 관리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지.
-달래강의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서는 충북도가 직접 나서 가칭 ‘달래강 유역회의’ 같은 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엔 환경단체와 지역민, 환경청, 문화재청, 수자원 관련 기관 등이 모두 참여하여 종합적인 관리방안과 발전 방안에 대해 함께 계획을 수립하고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까지의 일방적인 견지 보다는 함께 더불어 계획하고 관리 보전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목도~지문리 간 물굽이 ‘달래강의 하회마을’
잉어 뛰놀던 바위 옆엔 ‘잉어수 마을’ 자리  
김영수씨, “달래강 설화 배경지는 목도” 주장

 
목도(괴산군 불정면 소재지)를 지나는 달래강의 느낌이 전에 비해 다르다.

 

남한강과의 합류지점인 하류가 얼마 남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이곳 향토사학자 김영수씨(74)로부터 전해들은 소금배와 목도나루에 얽힌 이야기 때문이리라. 강폭은 훨씬 더 넓어보이고 물빛도 더욱 푸르러 보인다. 여울 역시 더욱 힘차게 몸짓하며 예전 뱃꾼들의 노랫소릴 금방이라도 토해낼 것 같이 재잘댄다.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이 물줄기를 타고 22자(尺)나 되는 소금배가 오르내렸다는 게 어디 가당하기나 한 얘기련만 김씨의 기억 속에선 여전히 살아있는 추억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으니 이를 두고 격세지감이라 하던가.


“제 나이 대여섯살 때입니다. 아버지가 콩자루를 어깨에 메주면 그걸 가지고 와서 소금과 바꿔가던 생각이 엊그제 같습니다. 예전엔 가호마을 강변(지금의 목도시장 옆)에 목도나루와 물물교환 장소가 있어 그곳서 곡식과 소금, 생선 등을 거래했지요.”

 

김씨의 아련한 추억을 뒤로 하고 목도(가호)를 지난 강물은 왼쪽으로 ‘달개들’을 거친다. 달개들은 목도와 음성천 건너 마을인 하산리 사이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말하는데 멀리 동쪽의 박달산에 해가 솟아오르면 가장 먼저 이곳 들판을 비추는 등 풍부한 일조량과 비옥한 토질로 각종 농산물이 생산되는 ‘달래강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다.


달개들 옆에서 음성천과 합류한 달래강은 다시 오른쪽으로 물머리를 틀어 감물면 이담(鯉潭) 마을을 향하는데 이담의 원 이름인 ‘잉어수’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내 들어선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마을자랑비가 내력을 소개하며 반기고 있다. 그 내용인 즉 본래는 잉어소였는데 잉어수로 바뀌었단다. 잉어수란 강 한가운데 서있는 잉어바위 아래로 항상 잉어떼가 모여들어 장관을 이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집성촌인 이 마을 안쪽에는 계담서원이 자리하고 있어 지금도 예와 시서풍류(詩書風流)를 숭상하는 이들의 수양처가 되고 있다.

 

 

계담서원

 

 

‘달래강의 화회마을’
 

괴산 목도지역의 가호리에서 달개들~잉어수~하문리~지문리로 이어지는 역S자형의 커다란 물굽이가 가히 ‘달래강의 하회마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기막히다. 사진은 인근 월출봉 정상에서 바라본 달래강 전경.

잉어수를 지난 강물은 또다시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감물면 하문리를 지나 지문리에서 계곡안으로 꼬리를 감추는데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해서 강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인근의 월출봉 정상을 올랐다.
 

월출봉은 괴산군 감물면 율리, 속칭 아시리 마을의 뒷산으로 얼마 전 산 중턱까지 벌목을 한 상태여서 한 길 넘게 자란 풀과 잔 나무들이 길을 가려 오르는데 무진 애를 먹어야 했다. 동행한 김영식씨(괴산향토사연구회)와 한 시간 가량 땀범벅을 한 후에야 비로소 정상에 도착했는데 정작 보여야할 강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속 타는 마음으로 이리저리 헤맨 끝에 벼랑에 매달린 커다란 소나무를 찾아 꼭대기에 올랐더니 금새 눈이 휘둥그레진다.

 

탁 트인 시야로 한눈에 들어오는 물굽이가 말 그대로 장관이다. 한 여름 뙤약볕에 땀 흘린 보람이 있다.
 

목도 가호리에서 달개들~잉어수~하문리~지문리로 이어지는 역S자형의 커다란 물굽이가 가히 ‘달래강의 하회마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기막히다. 김영식씨 또한 감탄사를 연발하며 달래강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냈다고 뿌듯해 한다.

 

 

경부대운하 노선이 계획됐던 배너미(舟越) 마을의 입구 전경.

‘한 건’ 했다는 마음에서인지 하산길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아시리에 들려 길안내를 해줬던 노인장에게 인사를 한 후 마을밖을 나서니 오른쪽으로 ‘주월리’란 안내판이 보인다. 얼핏 보아 ‘배(舟)’와 관련이 있는 마을 같아 김영식씨에게 물으니 “배가 넘어다니는 마을, 혹은 훗날 배가 넘어다닐 마을이란 뜻으로 ‘배너미’라 한 것이 한자로 주월리(舟越里)가 됐다”고 한다.

 

지명에 얽힌 선조들의 놀라운 선견지명을 이곳에서도 또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왜냐면 이 일대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경부대운하’ 노선이 계획되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달래강과 낙동강 수계를 잇는 최단거리가 바로 이곳 주월리 부근이란다. 실제로 지도를 보면 주월리 너머가 장연이요, 장연 너머가 바로 조령관문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 일대(하문리,주월리 일대)가 겉으로만 중단됐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진 가칭 달천댐의 제1 예정지란 점에서 대청댐 인근의 ‘무너미 고개’를 연상시킨다. 댐이 건설될 경우 넘나들 것이 ‘물’이 아닌 ‘배’란 것만 다를 뿐 상황은 똑같다. 섬뜩하다.

 

자연이 빚은 기막힌 절경과 선조들의 기막힌 선견지명을 동시에 확인한 아시리와 주월리를 뒤로 하고 찾아간 곳이 ‘괴산의 끝동네’ 지문리다.

 

예전에 한지(韓紙)를 만들었다는 이 마을은 마을앞의 조곡교를 사이에 두고 강 건너 동쪽으로는 괴산군 장연면 조곡리와 경계를, 하류인 북쪽으로는 충주시 이류면 문주리와 경계를 이루는데 하류쪽으로는 커다란 계곡이 막아서고 있어 더 이상 강줄기를 따라가긴 불가능하다.

 

 

조곡교에서 바라본 지문리 마을과 달래강. 계곡 뒷편이 수주 팔봉이다.


강가로 나 있다는 벼랑길을 포기하고 한터고개(목도~충주간)를 통해 문주리 수주 팔봉으로 들어가려고 되돌아 나오는데 동행한 김영수씨(향토사학자)가 돌연 중요한 의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달래강 이름을 낳은 ‘달래강 설화’의 배경지가 모두들 충주지역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괴산 관내의 목도지역 설화란 얘기다. 김씨는 “충주지역의 경우 예전엔 대부분 허허벌판이었기 때문에 설화에 나오는 ‘달래고개’ 등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이 많다”며 “따라서 강과 함께 고개,산길 등 설화에 나오는 여러 조건을 갖춘 목도지역이 달래강 설화의 배경지로 봐야하고 나아가 달래강 혹은 달천의 기점도 훨씬 상류쪽인 목도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달래나 ××’로 유명한 달래강 설화는 문헌설화가 아닌 구전설화란 점에서 그 배경지가 뚜렷하지 않고 또 전국적으로도 여러 형태의 달래강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으로 미뤄보아 김씨의 주장이 전혀 일리가 없지는 않은 듯하다. 또한 목도지역 하류로는 주민들도 괴강이 아닌 ‘달래강’ 혹은 ‘달천’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 것도 어느 정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달래강의 풍요로움
괴산 감물의 이담저수지 아래에 연출된 벼아트. 괴산군농업기술센터가 친환경농업을 선도하는 청정괴산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 유색벼를 이용해 연출한 농악(상모)놀이 장면. 벌판과 산자락이 만나는 곳에 달래강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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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간에 별천지요 세상밖 그림이로다”

19세기 노성도선생이 설정 九曲歌 남겨
대부분 물에 잠기고 1·9곡만 남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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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 주변, 특히 산수풍광이 빼어난 중류 주변에는 유난히 ‘구곡(九曲)’이란 명칭이 많이 전한다.

 

위로부터 청원 미원의 옥화구곡과 괴산 청천의 화양구곡·선유구곡, 칠성의 쌍곡구곡·갈은구곡, 그리고 최근에 존재가 알려진 괴산댐 내(칠성) 연하구곡과 연풍의 풍계구곡 등이 그것이다.


이들 구곡에는 구곡시(九曲詩) 혹은 구곡가(九曲歌)(옥화구곡은 六歌가 전함)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과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주자학을 공부하던 옛 선비들이 경치가 뛰어난 이들 지역을 찾아 나름대로 구곡을 설정하고 그에 걸맞은 시와 노래를 읊으며 그들만의 이상향을 동경한 데서 유래됐다.

 

지난 1957년 2월 괴산댐이 준공되면서 물에 잠긴 연하구곡(煙霞九曲)은 그로부터 44년 뒤인 2001년 괴산지역 향토사학자인 이상주씨(괴산향토사연구회·청주대 강사)가 한문학보 제4집에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씨에 의하면 연하구곡은 조선 후기 경은(敬隱) 노성도(盧性度, 1819~1893)란 선비가 설정하고 각 곡(曲)마다 정경을 읊은 연하구곡가를 남겨놓은 곳으로, 괴산군 청천면 운교리 경계로부터 칠성면 사은리 산맥이 마을에 이르는 달래강변에 위치해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물에 잠겨 있고 극히 일부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채 ‘전설속 절경’이 돼가고 있다.


연하구곡을 최초로 설정한 노성도 선생은 원래는 경북 상주에 살았으나 그의 10대 선조인 소제(蘇齊) 노수신 선생의 적소(謫所·유배생활을 하던 곳)를 관리하기 위해 이곳 연하동(현재 산맥이 마을에는 노수신 선생의 적소가 남아 있음·사진 참조)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산수의 아름다움에 감탄해 연하구곡(연하동)을 설정하고 많은 글과 시를 남겼는데 당시의 느낌을 적은 글에 연하구곡의 설정 배경을 읽을 수 있다.


‘불그레한 구름이 창가에 비치고 구곡에 아침햇살 비치니 이곳은 세상에서 뛰어난 산수다. (중략) 노니는 사람은 바람과 안개를 좋아하면서 시를 읊조리고 신선은 구름과 노을에 살면서 즐기는 것을 좋아하니 이곳 연하동은 가히 신선이 별장으로 삼을 곳이다.“(이상주 역)

 

 

저 안에 연하구곡이…
연하구곡은 조선 후기 노성도란 선비가 설정하고 각 곡(曲)마다 정경을 읊은 연하구곡가를 남겨놓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물에 잠겨 있고 일부만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낸 채 ’전설속 절경‘이 돼가고 있다.
 
현재 연하구곡 가운데 상단부가 물위로 드러나 옛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곳은 제1곡인 탑바위(일명 족두리바위)와 9곡인 병풍바위(屛巖) 뿐이다.

 

제1곡 탑바위(塔巖)는 댐 상류쪽 운교리 경계지점(운교리 아래 아가봉쪽 산자락)에 있고 제9곡 병풍바위는 댐 하류 왼쪽 절벽(산맥이 아래 천장봉쪽 절벽, 현 과수원 맞은 편)에 위치해 있다.

 

물속에 잠긴 나머지 절경 즉, 2곡 뇌정암(雷霆巖, 벼락바위) 3곡 형제바위(삼형제바위, 쌀개바위) 4곡 전탄(箭灘) 5곡 사기암(詞起巖) 6곡 무담(武潭, 무당소) 7곡 구암(龜巖, 거북바위) 8곡 사담(沙潭)은 1곡과 9곡 사이에 연이어 있었다고 한다.

 

연하구곡의 특징은 이렇듯 상류로부터 하류로 내려가면서 구곡이 설정돼 있다는 점이다. 다른 대부분의 구곡들은 하류에 ’동문(洞門·입구)‘과 함께 제1곡을 설정하고 이어 상류쪽으로 가면서 차례로 이름을 붙인 반면 연하구곡은 그 반대다.
 

이에 대해 이상주씨는 ”당시 노씨 문중인 광산 노씨 세거지가 경북 상주 쪽에 있었기 때문에 상류지역을 거쳐 자주 왕래하다 보니 그쪽 방향에 익숙해져 1곡을 상류쪽에 설정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고 풀이하고 있다.

 

연하구곡의 ’남아있는 정취‘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배를 타고 찾아간 제1곡 탑바위는 아직도 거대한 바위들이 층층이 탑을 쌓은 듯 푸른 물빛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서있다. 맨 윗단의 바위는 마치 신부의 족두리 모양을 하고 있어 바로 윗 동네인 운교리 주민들은 현재 ’족두리바위‘로 부르고 있다.
 

이 탑바위 바로 옆 강변에는 예전에 마당바위라는 넓은 바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물에 잠겨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또한 탑바위 주변에는 선유대(仙遊臺), 강선암(降仙岩)과 같은 글귀 외에도 많은 한시가 암각돼 있다고 하나 장마철 불어난 수위로 직접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움을 더했다.

 

그 중 탑바위 아래쪽 경사진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한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우뚝하게 하나의 바위 강가에 솟아있는데/ 꼭꼭 감싸 매우 조화로우니 조화옹(造化翁·조물주)의 솜씨일세/ 이름은 탑바위라 했는데 비둘기가 또한 즐기네‘(이상주 역)

 

 

연하1곡 ’탑바위‘

거대한 바위들이 층층이 탑을 쌓은 듯 푸른 물빛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탑바위. 맨 윗단의 바위가 신부의 족두리 모양을 하고 있어 인근 주민들은 ’족두리바위‘로 부르고 있다.


9곡 역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어 배를 타고 찾아가야만 했다. 괴산호를 가로질러 건너편 산인 천장봉 끝자락에 다다르니 밑둥을 수십길 물속에 담그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9곡인 병풍바위다.

 

이곳에도 많은 글귀와 한시가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고 하나 2줄의 종서로 써진 ’연하수석(烟霞水石) 정일건곤(精一乾坤)‘ 중 맨 윗자인 연(烟)과 정(精)자의 상단부만이 물위에 빼곰히 내밀고 있다. 풀이를 하자면 ’연하동의 제일가는 수석이요, 천지간에 유정유일(惟情惟一)이로다‘란 뜻이니 별천지가 따로 없단다.
 

이 글귀 옆에는 ’숭정사을축(崇禎四乙丑) 동치 사년 을축 이월 일(同治 四年 乙丑 二月 日)‘이라 새겨져 있다 하나 확인하지 못했다. 동치 사년 을축은 서기 1865년으로 노성도 선생은 바로 그해 이곳에 와 시를 짓고 글씨를 새겼던 것이다. 역시 물에 잠겨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이곳에는 ’연하동문(烟霞洞門)‘이란 글귀와 함께 9곡에 대해 읊은 연하구곡운(烟霞九曲韻)을 암벽에 새겨놓았다고 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깎아세운 병풍바위는 별천지니 천장봉 아래서 기꺼이 즐기노라/ 산은 높고 물은 푸르러서 진경을 이루니/ 이곳 연하동이말로 세상밖 그림일세‘

 

 

 연하9곡 ’병풍바위‘
연하9곡인 병풍바위에도 많은 글귀와 한시가 새겨져 있다고 하나 2줄의 종서로 써진 ’연하수석(烟霞水石) 정일건곤(精一乾坤)‘ 중 맨 윗자인 연(烟)과 정(精)자의 상단부만이 물위에 빼곰히 내밀고 있다. 원안이 물밖으로 보이는 연(烟)자와 정(精)자.
 

 

노수신 선생의 적소
연하구곡을 최초 설정한 노성도선생은 원래는 경북 상주에 살았으나 그의 10대 선조인 소제(蘇齊) 노수신선생의 적소(謫所·유배생활을 하던 곳)를 관리하기 위해 괴산 칠성의 산맥이(연하동)로 들어왔다고 한다. 노수신 적소는 현재 충북도 기념물 74호로 지정돼 있으며 수월정(水月亭)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괴산댐에 묻힌 옛절경 반세기 만에 모습 드러내
‘雲霞洞門(운하동문)’ 암각 문귀 최초 확인 개가
거치비 마을 유래된 우암 송시열 글씨 물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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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 물길 3백리 가운데 물흐름이 ‘노루 모가지’ 형국을 한 곳은 무척 많다.

 

하지만 마을 이름이나 지명으로서의 노루목으로 불리는 곳은 괴산군 청천면의 노루목과 충주시 살미면의 노루목 뿐이다. 이들 두 곳의 지형은 모두 물줄기가 노루목처럼 휘돌아 흐른다는 공통점 외에도 물살이 비교적 센 여울을 이루며 굽이친다는 점이다.


달래강의 윗 노루목, 즉 청천면 관내의 노루목을 빠른 물살로 줄행랑 치듯 휘돌아 나온 물길은 예전 ‘덕평 유원지’라 불리던 거봉리 앞 강변에서 잊혀졌던 옛추억을 되새기며 굽었던 허리를 곧게 편다. 이곳 덕평 유원지는 지난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철이면 청주 등 인근에서 물놀이를 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항시 북적였으나 지금은 화양구곡과 선유구곡, 청천 뒤뜰숲 등 숲과 그늘이 있는 곳으로 손님(?)을 빼앗겨 점차 퇴색해 가는 옛명소로 변해 버렸다.

 

거봉리에서 추억을 털고 일어선 물길은 다시 거봉교를 지나 덕평에서 지촌을 잇는 덕평1교를 향해 푸른 비단을 곱게 펼친다. 조금 전의 지루하던 곧은 물길과는 딴판이다. 거봉교서 덕평1교 방면으로 절벽을 끼고 굽이치는 달래강의 모습이 가히 절경이다.

 

거봉교 아래 절벽밑으로는 자라들이 햇볕을 쐬느라 자주 출몰하던 자라바위들이 빼곰히 머리를 들고 올라와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자연산 자라를 잡기 위한 싹쓸이식 남획이 성행하면서 지금은 예전처럼 많이 올라오질 않는다고 한다.

 

달래강의 여름
괴산군 청천면 거봉교 부근의 여름 풍경. 왼쪽 절벽아래로 ‘자라바위’들이 즐비하게 있으나 최근 남획으로 바위 위로 올라오는 자라 숫자가 크게 들어들었다.


거봉교와 덕평1교는 이 근처에서 가장 높게 세워진 신설교로서 높은 다릿발과 관련해 지금도 많은 얘기가 오가고 있다.

 

이들 다리가 건설될 당시인 2000년을 전후해 가칭 ‘달천댐’이 새로 들어선다느니, 기존 괴산댐을 확대 증설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나돈 이후 걸핏하면 댐 건설 얘기가 들리곤 했는데 그 때마다 호사가들은 높게 세워진 이들 다릿발을 증거물인 양 들먹이며 마치 사실처럼 말해오고 있는 것이다.
 

덕평1교가 세워진 양쪽 강변으로는 새마을운동이 물결치던 지난 1970년대 중반까지도 나룻배가 있어 덕평리와 지촌, 사기막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먼 이야기’가 됐다.


거봉교에서 덕평1교 사이의 구간은 매년 여름 장마철만 되면 하류쪽 괴산댐의 영향으로 수위가 올라가는 사실상의 댐 상류에 속한다. 따라서 이 구간부터 최소한 댐 직하부(괴산군 칠성면 외사·송동리)까지는 괴산댐 건설로 인해 나타난 각종 영향을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괴산댐 최상류 전경
괴산댐 최상류쪽인 덕평1교 부근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 지역에 머물면서 직접 썼다는 ‘거차비 동문(去此非 洞門)’이란 글귀가 암각돼 있다고 하나 지금은 물에 잠겨 확인할 길이 없다. 


괴산댐은 조선전업주식회사(한국전력공사의 전신)가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에 지난 1952년 착공, 5년만인 1957년 준공한 댐으로 비록 규모는 작지만  순수한 국내 기술진에 의해 조사,계획,설계,시공된 최초의 발전 전용댐이다.

 

지금은 괴산댐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지만 예전엔 수전댐, 칠성댐, 외사댐 등으로도 불렸으며 댐내 호수, 즉 괴산호는 괴산군 칠성면과 문광면, 청천면 등 3개 면에 걸쳐 있다.


댐의 유역면적은 671㎢, 총저수용량은 1500만톤으로 댐 치고는 많지 않은 양이다. 하지만 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역 안에는 최근 그 존재가 밝혀진 ‘연하구곡’ 등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던 옛 계곡들이 수많은 문화유적과 함께 물에 잠겨있으며 댐 조성에 따른 생태변화 등 자연환경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댐 건설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댐내 잊혔던 구곡들을 재조명하고 나아가 생태계에 나타난 각종 변화들을 되짚어보기 위해 수 차례에 걸쳐 댐유역을 현지 답사했다.


필자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댐 최상류쪽인 덕평1교 부근의 동쪽 절벽으로, 이곳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 지역에 머물면서 직접 썼다는 ‘거차비 동문(去此非 洞門)’이란 글귀가 암각돼 있다고 하는 곳이다.

 

필자가 다른 곳을 재켜두고 이곳을 먼저 찾은 이유는 인근에 있는 지촌리의 ‘거치비’ 마을 이름이 이 글귀의 ‘거차비’에서 유래됐을 만큼 상징성과 역사성이 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암 선생이 ‘가히 한번 가볼 만한 곳’이라고 바위에 글자까지 새겨가며 감탄했던 이 지역의 대표적인 옛명소였기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현지 어부의 도움으로 배까지 빌려타고 찾아간 취재팀은 이 일대를 이 잡듯 뒤지며 암각된 글자를 찾아 헤맸으나 끝내 확인하지 못한 채 현지 주민인 박래성씨(81)로부터 “물속에 잠겨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만 듣고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더욱이 아쉬움을 더한 것은 ‘동문(洞門-물가의 절경 혹은 경승지의 입구란 의미로서 특히 구곡과 같은 연이은 절경의 첫 번째 절경에 흔히 붙임)’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는 증언으로 보아 예전엔 이 일대를 중심으로 빼어난 절경이 강을 따라 줄줄이 이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이렇다할 절경이 남아있지 않아 상전벽해의 무상함을 다시금 느껴야만 했다는 점이다.

 

달래강의 겨울풍경과 운하동문 글귀

괴산댐 최상류 운교리 부근의 겨울풍경이 색다른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원내는 취재팀이 최초로 찾아낸 ‘운하동문’ 암각글자로 사진의 물굽이 친 절벽 부근 바위에 새겨져 있다. 

 

운하구곡의 사모바위
바위절벽 위에 생뚱맞게 올려진 바위 모습이 전통혼례때 신랑이 쓰는 사모와 비슷하다해서 사모바위라 이름 붙여졌다고 하나 얼마 전 외지인들이 올라가 사모를 훼손하는 바람에 ‘어색한 사모바위’가 돼 버렸다. 원내가 훼손된 사모 부위.

 

‘거차비 동문’의 존재를 증언해 준 박래성씨


이러한 아쉬움은 두 번째로 찾아간 운교리앞 절벽에서도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다만 이곳 절벽에서는 배를 빌려준 여영희씨(현지어부·운강식당 운영)의 도움으로  ‘운하동문(雲霞洞門)’이라고 암각된 네 글자를 최초 확인하는 보람을 얻었지만, 이 일대 역시 댐 조성후 변해진 물길로 옛정취는 찾아볼 수 없고 현대적인 댐 풍경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운하동문 글귀가 암각된 산자락을 끼고 운교리앞을 벗어날 즈음 수십길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나타나는데 이곳이 그 옛날 운하구곡의 마지막 절경으로 추정되는 사모바위다. 바위절벽 위에 마치 눈사람의 머리처럼 생뚱맞게 올려진 바위 모습이 전통혼례때 신랑이 쓰는 사모와 비슷하다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하나 얼마 전 외지인들이 올라가 사모를 훼손하는 바람에 ‘어색한 사모바위’가 돼 버렸다.

 

거봉교 아래의 겨울 풍경(왼쪽)과 여름 풍경 비교

산자락이 품을 연 곳으로 속리천은 흐르고

최상류 대부분 전형적인 산골 풍경 멋진 풍경

일부구간 하천정비사업으로 점차 옛 모습 잃어


산경표의 원리에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란 말이 있다. 산은 스스로 물을 나눈다는 뜻이니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뜻과도 같다.


또 산경표에서는 두 능선 사이에 반드시 계곡이 있고 두 계곡 사이에는 반드시 능선이 있다고 본다. 또한 물길은 능선보다 낮은 곳에서 시작해 서로 끊기지 않고 이어져 흐르니 산 없이 시작되는 강이 없고 강을 품지 않은 산이 없어 결국 산과 강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 흘러온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룬 뒤 바다로 흘러가듯 이 산 저 산줄기가 모여 정간과 대간으로 흘러들고 마침내 백두산으로 향하니 이 모든 것이 한반도의 산과 강을 이룬다는 것이다.


옛 선조들의 기막힌 논리를 생각하며 눈앞에 펼쳐진 속리산 자락을 보니 옛말이 틀림없다.

 

속세를 잠시 떠났던 속리산 자락이 넉넉한 품을 이제 막 열기 시작하는 곳으로 속리천(달래강 최상류) 물머리가 삐죽이 내밀고 그 바로 옆으로 '국민소나무' 정이품송이 600년 전설의 모습으로 우뚝 서있다.


숱하게 속리산을 드나들었어도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다.

 

물길에 서서 물과 산의 개념으로 바라보니 더욱더 새롭다. 본류(남한강)랑 만나는 곳이 북쪽이니 좀더 빠른 그쪽을 향해 물길을 틔울 법도 한데 정반대 방향인 남쪽을 향해 점잖게 머리를 틀고 있으니 이 또한 속리산의 매력이자 달래강의 멋이 아닌가 싶다.


천변에 자란 달뿌리풀이 한 길 가량 자라있다. 사내리 집단지구시설에서 처음으로 '인간냄새'를 맡으면서 BOD를 품었다고는 하나 물빛이 아직은 꽤나 맑은 표정이다. 물가엔 검은 듯 푸른 모습의 물잠자리 떼가 산란기를 맞아 사랑을 나누느라 정신없이 오가고 둑방에는 앙증맞은 엉겅퀴가 망울을 터트린 채 바람에 하늘거린다.

 

인근 도로로 관광객이 수없이 드나들며 도시내음을 전해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전형적인 산골 풍경이다.

 

속리천과 정이품송
속세를 잠시 떠났던 속리산 자락이 넉넉한 품을 이제 막 열기 시작하는 곳으로 속리천 물머리가 삐죽이 내밀고 그 바로 옆으로 '국민소나무' 정이품송이 600년 전설의 모습으로 우뚝 서있다. 숱하게 속리산을 드나들었어도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다.


다시 물길을 타고 상판교를 지나 중판리 쪽을 향하니 말티고개 쪽 골짜기서 내려오는 실개천과 만난다.

말티고개 정상은 익히 알려진 대로 천왕봉서 시작한 한남금북정맥의 마루금이다. 고개 너머는 금강수계요 속리산 쪽은 속리천(달래강·남한강) 수계다.


이 지점부터 한동안은 왼쪽으로 한남금북정맥 능선을 두고 흐른다. 따라서 인근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빗물은 그대로 속리천의 몸이 된다.


하천이 한바탕 휘도는 곳으로 둑방길을 따라 들어가니 중판리 점말교가 나타난다. 다리위에 서서 물이 흘러드는 위쪽을 바라보니 물길이 가냘프다.

 

봄부터 계속되는 가뭄으로 하천물이 바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점말교 바로 아래에 최근 '무전원자동수문'이 세워져 물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훨씬 많아졌지만 이곳 역시 텅 비어 있다. 올들어 한 차례, 그것도 개나리꽃 필 무렵에 단 한번 물이 넘치고 말았으니 가뭄정도가 어떤지 상상이 가리라.


이 자동수문은 보은군청 이호천담당(경제사업단 특허개발담당)이 직접 개발한 것으로 수질과 수량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최신형 수문이다. 보은군청은 앞으로 이 자동수문을 속리천 곳곳에 더 설치해 연중 맑은 물이 흐르도록 한다는 방침이어서 그 효과가 기대된다.

 

 

무전원자동수문
봄부터 계속되는 가뭄으로 현재 속리천은 바닥을 보이고 있다. 오죽하면 중판리 자동수문으로 올들어 한 차례, 그것도 개나리꽃 필 무렵에 단 한번 물이 넘치고 말았으니 가뭄정도가 어떤지 상상이 가리라. 물이 넘칠 때의 모습(위)과 현재 모습(아래).

 

중판리 자동수문 아래에는 30년전(1979년) 건설된 '희망의 다리'가 고목처럼 누워있다.

 

인근에 속리터널이 뚫리면서 교통량이 많아지자 바로 아래에 중판교가 신설돼 다리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그런 탓인지 다리 입구에 새겨진 희망의 다리란 이름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인다.

 

보은군과 대한석유공사가 이 다리를 건설할 당시만 해도 이 지역 주민들에게 '밖의 세계로 통하는 희망'을 주기 위해 야심찬 이름을 붙였으련만 세월이 흐르면서 퇴물로 전락한 채 피서객들의 주차장과 그늘막 역할을 할 뿐이다.

 

속리천도 세월처럼 그렇게 흘렀으리라. 뒤에서 밀려오면 밀려오는 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채지 않고 미련없이 낮은 곳만을 향해 줄달음 쳤으리라.


잠시 세월무상에 젖었다 발길을 돌리려니 새로 들어선 중판교 초입에 낯익은 돌탑이 금줄을 두르고 서있다. 동네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었단다. 자연을 아는 순수한 사람들의 마음이다.

 

물길을 따라내려가다 속리산면의 하수처리상황은 어떨까 궁금해 하천옆(중판리)에 세워진 속리하수처리장을 잠깐 들렀다. 보은군이 지난 2003년부터 한국수자원공사에 위탁해 관리운영해 오고 있는 이 하수처리장은 하루 처리용량 4천톤 규모로 인근의 상판·중판·사내·갈목리 일원 하수를 총13km의 차집관거를 통해 걸러내고 있다. 방류구를 살펴보니 비교적 맑은 물이 속리천으로 흘러들고 있다.


다시 도로로 나와 속리터널 앞을 거쳐 하류로 향하니 오른쪽으로 문화마을(중판2리)이 보일 쯤 하판교가 나타난다. 물길은 계속해서 왼편에 한남금북 마루금을 끼고 도로와 평행으로 달린다.


'샨띠와남'이란 독특한 이름의 요가수련원을 지나니 북암리와 마주친다. 마을 앞 세강교 아래엔 수령 3백년 된 느티나무가 마을 역사를 대변하듯 마을간판처럼 서있고 왼쪽 수백m 위쪽으로 하천변 바위 절벽과 조화롭게 자란 소나무가 고풍스런 자태로 객을 반긴다.


37번 국도를 따라 산모퉁이를 한바퀴 휘돌고나니 백현리 마을이다. 백현교로 들어서자 다리 아래 개울가 모습이 지금까지 보여온 자연하천의 모습과 확연히 다른 게 어색해 보인다. 최근에 마친 하상정비 사업으로 둑방엔 철망이 깔리고 하천바닥은 편평하게 다듬어져 '죽은 느낌'을 주고 있다.

 

 

속리천과 한남금북정맥의 멋진 만남
37번 국도를 따라 보은군 속리산면과 산외면 경계를 지나니 잠시 뒤 백석2교가 쉬어가라고 객을 부른다. 다리 건너 왼쪽 빈터로 들어서자 한폭의 동양화가 수면위에 떠있다. 한남금북정맥의 능선이 인근 농경지와 어울어져 물위에 비친 게 여간 멋진 게 아니다.

 

또 한바탕 휘도는 산모퉁이 중간에 속리산면과 산외면 경계가 있고 이어 나타나는 백석2교가 잠시 쉬어가란다. 다리 건너 왼쪽 빈터로 들어서자 한폭의 동양화가 수면위에 떠있다. 한남금북정맥의 능선이 인근 농경지와 어울어져 물위에 비친 게 여간 멋진 게 아니다. 지는 석양이 아쉬워 발길을 돌리니 백석1교가 지난 겨울의 모습을 떠올린다. 찬 바람이 불던 늦겨울 예비탐사차 이곳을 찾았을 때와 물빛이 확연히 다른 게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계속>

"천왕봉서 물머리 일으켜 3백리 물길 시작" 
실질적인 시작점은 백두대간 마루금
'속리천'이란 이명으로 최상류 흘러

 

 

■달래강 물길의 시작점


달래강 물길은 그동안 속리산 비로봉 아래 상고암 약수로부터 시작된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번 탐사 결과 달래강의 제1 발원지는 천왕봉 아래의 봉수대터 샘물임이 새롭게 밝혀짐에 따라 달래강 3백리 물길은 바로 이 샘물로부터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물론 실질적인 물흐름이야 천왕봉서 문장대를 잇는 백두대간 마루금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지만 학계서 인정하는 강의 시작점은 '하구 또는 합류지점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샘물 형태의 물뿌리(水源)'이기에 천왕봉 봉수대터 샘물이 진정한 '달래강의 시작점'인 것이다.


다만 이번에 함께 찾아진 비로봉 남쪽사면의 굿당터 샘물(제2 발원지-상환암과 천왕봉을 잇는 등산로변 바위굴 샘물)과 기존의 발원지로 알려진 상고암 약수(제3 발원지)도 달래강의 주요 시작점으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들 발원 샘물들은 각기 몸을 일으켜 법주사쪽 골짜기로 흘러들면서 달래강의 최상류 수역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 천왕봉의 봉수대터 샘물은 서북방향으로 물흐름을 시작해 산의 중허리 쯤에서 제2 발원샘인 굿당터 샘물과 몸을 섞은 다음 이내 상환암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다가 잠시 은폭동 폭포서 몸을 떨군 다음 비로산장 아래 삼거리(등산로를 따라 경업대·상고암 방면과 상환암·천왕봉 방면으로 나눠지는 갈림길)서 비로산장쪽으로부터 흘러오는 물길과 하나가 된다.

 

발원 샘물의 합수
천왕봉과 비로봉에서 각기 발원한 달래강 물머리는 비로산장 아래 삼거리(천왕봉·상환암쪽 등산로 입구)에서 서로 만나 비로소 하나의 물줄기를 이룬다. 왼쪽이 상고암·경업대쪽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 오른쪽이 비로봉 남쪽사면과 천왕봉·상환암쪽서 내려오는 물줄기.


비로산장쪽의 물길이란 다름 아닌 상고암 약수로부터 시작한 물줄기와 경업대·입석대쪽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상고암 입구 삼거리(경업대 방면과 상고암 방면의 갈림길)서 만나 비로산장을 거쳐 내려오는 물길을 말한다.


이들 주요 발원지 물길의 특징은 처음엔 석간수 형태의 샘물을 이루다가 샘물 밖을 벗어나 물흐름을 시작하면 다시 돌과 바위틈으로 스며들어 모습을 감췄다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길 수십 차례씩 반복하면서 앞서 말한 합류점(비로산장 상·하부)에 와서야 비로소 계곡수 형태를 띤다는 점이다.


이들 물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갑자기 물은 보이지 않고 돌과 바위 밑으로 졸졸거리며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 이른바 건천지역이 유난히 많다. 그러다가도 여름철 장마 기간이 돼 유수량이 많아지면 물길이 겉으로 드러나 크고 작은 폭포와 급류를 이루는 등 새하얀 물줄기가 온 골짜기를 떠들썩하게 만든다.


비로산장 아래부터 제법 계곡수 형태를 띠기 시작한 달래강 물길은 다시 세심정 부근서 문장대쪽 물줄기와 합쳐지면서 몸집을 불린 뒤 조선 세조대왕이 피부병을 고쳤다는 목욕소를 지나 태평교 밑에서 사내저수지로 흘러든다.


사내저수지는 달래강이 속리산서 물머리를 일으킨 후 미처 산자락을 벗어나기 전에 만나는 첫 인공 구조물로서 인근 법주사를 비롯한 속리산면 일대의 주요 상수원 역할을 하고 있다.


보은군이 관리하는 사내저수지 상수원은 자연유하식 식수전용댐으로서 총 14만2,500톤의 저수용량을 갖고 있다. 보은군은 이곳 상수원을 통해 모두 485가구 1,759명의 주민들에게 하루 1,238톤의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보은군은 지난 1988년부터 사내저수지를 포함한 속리산 자연환경보전지역내 계곡들을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발원지에서 사내저수지까지
달래강은 처음엔 석간수 형태의 샘물을 이루다가 샘물을 떠나 물흐름을 시작하면 다시 돌과 바위틈으로 스며들어 모습을 감췄다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길 수십 차례 반복하면서 비로산장과 세심정 부근에 와서야 비로소 계곡수 형태를 띤다. 세심정 부근서 문장대쪽 물줄기와 합쳐진 달래강 물길은 목욕소를 지나 태평교 밑에서 사내저수지(맨 오른쪽)로 흘러든다.

 

■속리천의 이름으로


사내저수지를 지난 물길은 법주사 바로 앞에서 동암쪽 계곡수와 만나면서 '속리천'이란 이름으로 사내리를 향해 물머리를 남쪽으로 튼다. 속리천은 달래강 물길이 발원지로부터 흘러내려 오면서 처음으로 얻게되는 '법정 하천(지방 2급 하천)으로서의 명칭'이다. 따라서 이곳부터는 계곡수 형태를 벗어나 비로소 '자연하천'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고 수량도 많아진다.


속리천이란 이름은 달래강이 하류로 내려가면서 구간에 따라 달리 불려지는 여러 이명(異名) 중의 하나로, 물길이 청원군 미원면 관내로 접어들어 '박대천'이란 이름으로 불려지기 전까지의 명칭이다.

 

속리천이란 이름으로
사내저수지를 지난 물길은 법주사 바로 앞에서 동암쪽 계곡수와 만나면서 '속리천'이란 이름으로 사내리를 향해 물머리를 튼다.


법주사를 지난 물길은 다시 야영장 부근서 남산쪽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물길과 합류한 후 사내리 집단시설지구(상가지역)와 법주사를 잇는 다리를 지나 하천내에 설치된 분수대서 잠시 몸을 풀어헤친 뒤 묘봉쪽서 내려온 물길과 합쳐져 정이품송을 향해 줄달음질 친다.


법주사에서 사내리 집단시설지구까지 흐르는 동안 달래강 물길은 처음으로 '인간냄새'를 맡으면서 물빛도 달라지고 수질도 드디어 'BOD'를 띠기 시작한다.


상가지역 건너편 사낙골을 지나 대형버스 주차장을 옆으로 끼고 산모퉁이를 도니 이내 '국민 소나무' 정이품송이 600여년의 전설을 머리에 인 채 물길을 반긴다.

 

하지만 우산을 펼쳐 놓은 듯 말끔하던 예전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태풍에 잘려져 나간 상처를 허공에 떠 받들고 누런 솔잎에다 흉칙한 철기둥을 버팀목 삼아 근근이 서 있는 게 여간 측은해 보이는 게 아니다.

 

현재의 병색도 병색이거니와 그 병색을 더욱 짙게 만든 것이 다름아닌  인근 하천의 습기, 즉 달래강(속리천) 물길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안쓰럽다.

 

바로 옆으로 도로 공사를 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뿌리를 흙으로 깊게 덮는 바람에 물빠짐이 불리해져 화근이 된 데다 인근 하천에서는 끊임없이 수분을 과잉공급해 물과는 상극인 소나무 건강이 더욱 악화된 것이다. 유일한 '벼슬나무'이기에 수시로 링거주사를 맞는 호강(?)을 누리고는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병색이 짙어지는 것을 보면 그 명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달래나 보지…" 슬픈 남매 사연 담은 설화 대표적
물맛 좋아 달천(甘川), 수달 많이 살아 수달천(獺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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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달천)은 사연이 참 많다. 특히 명칭 유래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와 기록이 전한다.

 

우선 충주를 중심으로 널리 알려진 달래강 설화부터 들어보자.


"먼 옛날 친남매가 길을 가다 소나기를 만났다. 때는 여름인지라 앞서가던 누나의 얇은 옷이 비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뒤따라가던 남동생은 어쩔 수 없이 누나의 드러난 몸을 보게�고, 순간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심성이 착했던 남동생은 자신이 엉뚱한 생각을 한 게 죄스러워 그만 돌로 아랫도리를 쳐 죽고 말았다.
한참 뒤 남동생이 따라 오지않는 것을 안 누나가 이상히 여겨 되돌아가보니 아뿔사, 동생이 아랫도리에 피를 흘리며 죽어있지 않은가. 이를 본 누나는 그제서야 전후사정을 알아채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하는 말이 '차라리 달래나 보지, 말이나 해 보지…' 그랬다는 것이다."


이같은 슬픈 얘기가 전해지면서 그때부터 달래강이란 이름이 생겼고 누나가 동생을 끌어안고 통곡한 곳은 달래고개라 불렀다 한다.

 

다음은 달천에 관한 유래다.


때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게 됐는데 이 때 이여송이 명군의 장수로 들어오게 됐다. 이여송의 아버지(이성량)는 본래 조선사람이었으나 철령위로 도망가 살았기에 이여송 역시 근본이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망각한 채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며 중요한 혈을 끊는 등 만행을 일삼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여송 휘하의 한 장수가 충주지역을 지나다 갈증이 나자 맑게 흐르는 강물을 마셨는데 그 물맛이 달고 좋아 감천(甘川)이라 한 것이 훗날 달천으로 변했다고 한다.


물맛이 달고 맛있다는 뜻의 또다른 이명으로는 단냇물, 달냇물 등이 있으며, 충주 인근의 달천동,단월동,단호사와 같이 '달' 혹은 '단'자가 들어간  지명은 한자어에 상관없이 모두 '단 물맛'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또 일설에는 동국여지승람에 달천(獺川)으로 표기돼 있는 점을 들어 본래 이 강에는 예부터 수달(獺)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수달내라는 뜻의 달천(獺川)으로 불리다가 후에 '달' 자가 채음돼 달래강(達川)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달래강 인근에서는 조선초부터 수달피가 진상됐다는 얘기가 전한다.


달천과 관련된 다른 기록으로는 이중한의 택리지에 '속리산 정상에서 동으로는 낙동강, 서로는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며 북으로는 충주의 달천(達川)이 되어 한강으로 흘러든다'고 적혀있다. 또 조선시대 동람도에는 충주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산천,덕천,달천(獺川)으로 각각 표기하고 있어 당시에도 달천이란 이름과 함께 여러 명칭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덕을 입은 강, 즉 덕천(德川)이란 이명도 전한다. 조선시대 벌미란 마을의 한 사내가 자신의 집으로 탁발 온 스님의 권유에 따라 달천에 징검다리를 놓았는데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병자(病者)가 다리 덕에 목숨을 건지게 되자 그 병자를 업고왔던 노인이 '과연 덕을 입은 강이로구나(於是 彼德之川也)' 한 것이 전해져 덕천이란 이름이 생겼다 한다.

 

달래강은 지금도 지역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최상류인 보은 속리산지역에선 속리천, 청원 금관~어암리 부근에선 박대천, 괴산 청천부근에선 청천강 혹은 가무내(현천), 괴산읍 부근에선 괴강(槐江) 등으로 불리다가 충주시 달천동에 이르러서야 달래강이 된다.


속리천은 발원지인 속리산에서 이름을 따왔고 박대천은 인근 어암리(충북 청원군 미원면)의 박대소(沼)에서 유래됐으며, 청천강은 괴산 청천지역을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청천지역, 특히 화양동 부근에서 불리는 가무내는 '검은 내(현천.玄川)'란 뜻으로 인근 강바닥이 검은 바위와 돌로 돼 있어 물이 검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괴강은 괴산지역 주민들이 특히 달래강을 대신해 부르는 이름으로 괴산(槐山)의 '괴(槐)' 자를 따왔다.

 

 

�달래강의 다른 이름 '박대천'
달래강은 지금도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최상류인 속리산 부근에선 속리천, 청원 미원 부근에선 박대천, 괴산 청천부근에선 청천강 혹은 가무내(현천), 괴산읍 부근에선 괴강(槐江) 등으로 불린다.

< 청천천의 겨울>

 

 <가무내(현천)의 봄 전경>

 

<속리천의 겨울>

 

   
도도한 물흐름 달래강
  달래강 3백리 물길은 유독 계곡이 많아선지 더욱더 도도히 흐른다. 그 도도한 물흐름은 이 고장 특유의 문화와 전통을 탄생시킨 '역사의 터전'이자 주민들의 삶과 생을 이어준 '생명의 요람'이다. 125km 물굽이에 대한 심층 탐사를 통해 달래강의 어제와 오늘을 재조명하고 참다운 가치를 발굴해냄으로써 내일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한다.(사진은 옥화5경인 금봉서 바라본 달래강 전경)  
 
숱한 설화와 사연 안고 도도한 물흐름

심층탐사 통해 참 가치 발굴 비전 제시

역사·생태·문화·개발·보전방안 재조명



◇ 삶의 젖줄, 역사의 터전

   
 
   
 
예부터 물맛이 달다하여 단내(달래,甘川) 혹은 수달이 많이 산다해서 수달내(달천,獺川), 덕을 입은 강이라하여 덕천(德川)으로 불리던 달래강. 속리산 천왕봉에서 물머리를 시작해 충주 탄금대 부근서 남한강과 하나 되기까지 총연장 125km를 남에서 북으로 굽이치며 흐르는 커다란 물줄기다.

조선초 성현의 <용재총화>에 '조선 제일의 물맛'으로 기록될 만큼 물맛 좋기로 유명했던 달래강은 지금도 주민들의 중요한 생명수이자 젖줄로서 숱한 설화와 사연을 안고 도도한 물흐름을 하고 있다.

3백리 물길로 이어지는 본류와 지류 곳곳에는 수려한 자연경관을 빚어 청풍명월의 멋을 한껏 더해놓고, 각 고을 마다엔 삶의 숨결을 불어넣어 이 고장 특유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탄생시켜 놓았다. 이른바 중원문화의 한 뿌리이다.

백두대간과 한남금북정맥을 분수계로 하여 동으로는 낙동강, 남·서로는 금강과 물굽이를 달리하는 달래강 유역은 속리산을 중심으로 화양계곡과 쌍곡계곡, 옥화9경, 수주팔봉, 수옥정폭포, 용추폭포 등 수많은 계곡과 명소를 아우르고 있다. 또 그 품안에는 멸종위기종이자 천연기념물로서 소중한 자연자원인 수달과 하늘다람쥐, 까막딱따구리, 미선나무, 망개나무 등이 분포하고 있다.

또한 물줄기 주변엔 '국민 소나무' 정이품송을 비롯해 그 부인격인 정부인송, 용이 틀임하는 듯한 기괴한 모습의 용송(왕소나무) 등 이름난 소나무들이 천년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호서제일의 가람 법주사, 우암 송시열의 화양서원과 만동묘, 벽초 홍명희의 삶과 혼이 깃든 괴강변,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 충민사, 우륵의 가야금 선율과 신립장군의 호국얼이 배 있는 탄금대 등이 지역민의 자긍심을 키우는 역사와 문화의 산실로 남아 있다.

또한 물 맑고 공기 좋아 곳곳이 청정지역인 달래강 유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특산물이 산출되고 있다. 봄·여름이면 산과 들에 온갖 나물들이 지천하고, 가을이면 송이,능이,싸리버섯 등 각종 버섯이 쏟아져 나온다. 인근 농경지에서 생산되는 인삼은 충북의 대표적인 농산물로서 한국 인삼농업의 역사를 다시 쓰는 주역으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고 사과, 복숭아, 고추, 절임배추, 논콩 역시 전국에 충북 농업을 알리는데 앞장서 온 효자 농산품이다.

달래강 물길은 곧 이 지역 주민들의 삶과 생을 이어준 요람이자 터전이요, 애환과 기쁨을 함께 해온 역사의 증인이자 동반자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달래강에도 변화를 재촉하는 시대의 거센 바람이 불고 있다. 다름 아닌 온천개발과 댐건설을 둘러싼 논란이 십수 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데다 최근엔 대운하 통과 예상지역으로 부각되면서 주민들을 또다시 찬반논란의 장으로 내몰고 있다. 지역의 위기냐, 발전의 계기냐를 놓고 주민들은 심한 갈등까지 빚고 있다.

이에 지역 환경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심혈을 기울여온 충청타임즈가 달래강 3백리 물길에 대한 심층취재를 통해 어제와 오늘을 재조명하고 참 가치를 발굴해냄으로써 내일을 향한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달래강의 설경
  달래강에 눈이 내렸다. 계곡과 바위, 물, 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 놓았다. 설경에 묻힌 달래강이 금새라도 숱한 전설을 통해낼 것 같다.  
 


◇ 달래강의 참모습 재조명

이번 기획취재에서는 △달래강의 현황(발원지 및 지리현황)을 비롯해 △역사(유래, 속리산 삼파수와의 관계) △문화(명승유적, 설화, 민속) △달래강 사람들 △특산물 △생태(식물상, 어류상, 조류상, 포유류상, 곤충류상, 양서파충류상 및 주요 동식물) △보전과 개발(관리·개발 실태와 보전방안) 등이 주요 내용으로 다뤄질 예정이다.

취재팀은 달래강의 사계(四季)를 담기 위해 이미 지난 1월부터 사전 취재에 들어가 문헌·자료 조사와 함께 주요 지역에 대한 예비 답사, 겨울철새 및 발원지 탐사 등을 실시한 바 있으며, 이어 오는 10월까지 달래강 물길 전 수역에 대한 현지 답사 및 탐사를 통해 달래강의 참모습을 심층 취재 보도한 후 11∼12월 중에는 보전방안 등 결론 도출을 위한 지상 토론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특히 역사 문화와 생태 분야는 각계 전문가들을 초빙해 동행 취재 및 탐사를 실시하고, 희귀종으로서 우리나라 주요 자연유산이자 천연기념물인 하늘다람쥐와 수달, 까막딱따구리 등에 대해서는 현장 잠복 취재및 촬영을 통해 상세한 서식현황과 생태를 밝힐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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