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의 통곡
해질 무렵 인가 근처나 물가 갈대밭에서 흔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하도 괴이한 소리라서 정확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언뜻 들으면 "어어읔 어어읔!" 목놓아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웨에엑!" 가래뱉는 소리 같기도 한 아주 묘한 소리다. 인터넷 검색창을 뒤져봐도 딱히 '이 소리다' 라고 설명한 글이 없을 정도로 참으로 기괴하다.
어쨋거나 그 소리는 듣기 좋거나 편한 소리는 아니다.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소리 혹은 비명에 가깝다. 해서 그 소리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어떤 짐승이 올무나 덫에 걸려 지르는 외마디 소리로 착각하기도 한다.
가끔은 혼자서 산길 걷는 사람을 혼비백산케 하기도 하는 그 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고라니 소리다. 사람이 듣기에 절박하게 들릴 뿐이지 고라니들이 그저 평상시에 내는 신호음에 불과하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거나 새끼를 부를 때 그들은 이상하리 만치 절규하는 듯한 괴성을 낸다. 제 방귀에도 놀라 걸핏하면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소심한 성격에다가 공격력이라고는 뒷발질 혹은 수컷의 송곳니가 전부인 영원한 피식자의 신세를 한탄이라도 하는 양 그들은 이해 못 할 기이한 소리로 의사소통을 한다.
하지만 고라니는 절대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평생 초식만 하는 온순한 동물이지만 수백만년 동안 한반도 생태계를 지켜온 터줏대감이다. 대륙사슴, 백두산사슴, 노루 등 다른 사슴과 동물들은 이미 자취를 감췄거나 개체수가 현저히 줄어든 반면 고라니 만큼은 여전히 꿋꿋한 삶을 이어오고 있다. 학자들이 고라니를 일컬어 한반도 생태계의 최후 생존자 또는 최후 승리자로 표현하는 것은 그같은 강인한 유전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고라니가 처음 이 땅에 뿌리 내린 것은 수백만년 전. 소위 고황하라는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중국대륙과 한반도가 서로 붙어 있던 시기에 그들은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빙하가 녹으면서 서해가 생겨났고 대륙과 한반도가 분리되면서 고라니 혈통은 중국계(중국아종)와 한국계(한국아종)로 나뉘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고라니는 전 세계에서 한반도와 중국에만 사는 이 지역 고유종이다. 더군다나 현존 개체수의 대부분이 한반도에 산다.
고라니는 형태형질 분류학적으로도 특이한 동물이다. 전 세계 사슴과중 유일하게 뿔 대신 송곳니를 가졌고 유두가 4개다. 한 마디로 진화가 덜 진행된 고대형(古代型) 동물이다. 사향노루도 송곳니가 있지만 과가 다르다.
고라니는 유난히 물가를 좋아한다. 헤엄을 잘 치며 보금자리도 물가 풀숲에 잘 튼다. 고라니를 Water Deer 즉 물사슴이라 부르는 이유다.
고라니 수컷들은 교미철엔 더욱 괴상한 소리를 낸다. "또르륵 또르륵!". 수컷들이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힘겨루기 할 때 내는 독특한 소리다. 일부다처제인 고라니의 세계, 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수컷들의 힘겨루기와 과시음. 마치 귀뚜라미 울음소리 같은 그 독특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요즘 같은 겨울철이다. "또르륵 또르륵!" 치열하지만 이 보다 더 자연스러운 소리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사랑다툼이 막 시작될 즈음, 하필이면 최악의 시련을 맞는다. 인간의 수렵철, 밀렵철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총기류 뿐만 아니라 곳곳에 설치된 올무와 덫이 그들의 목과 발목을 옥죈다. 또 서식지 주변은 온통 도로다. 로드킬 건수가 가장 많은 시기 또한 이 철이다. 일년에 단 한 번 있는 교미철이 채 지나기도 전에 불귀의 객이 되는 고라니들이 부지기수다.
"어어읔 어어읔!" 그들의 소리가 갈수록 통곡으로 들리는 이유가 이 때문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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