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를 마치며

 
“달래강의 숨결은 살아있다”

 

개발의 대상이 아닌 ‘상생의 대상’
소중한 자원 인정하고 지켜나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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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의 숨결’은 살아있다.

 

멈춘 호흡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숨소리다. 태고적 한반도 탄생 이후부터 시작됐을 그 숨소리는 수천 수만년을 이어오는 동안 다소 박동이 깨지고 리듬을 잃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건강한 숨결을 자랑하고 있다.

 

충북 보은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해 충주시 탄금대 합수지점까지 총연장 125km를 굽이치며 흐르는 달래강(달천). 우리나라 중부권의 중요한 수원(水源)이자 젖줄인 남한강의 한 지류로서, 충북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삶의 터전으로서 고고한 물흐름은 계속되고 있고, 그 고고한 삼백리 물길 곳곳에는 예나 지금이나 고유의 숨결들이 살아 꿈틀대고 있다.

 

 

 

 

 

 

 

 

 

 

 

 

 

 

 

 

 

 

 

 

 

 

 

 

 

 

 

달래강의 숨결들./자연닷컴

 

달래강은 우선 지역민들의 소망을 안고 흐르고 있다. 크고 작은 물줄기 마다에는 어김없이 마을이 자리하고 있고 그 어귀엔 으레 서낭당이 모셔져 있다. 가는 곳마다 느티나무,팽나무,소나무 같은 신목(神木)들이 금줄이 쳐진 채 한 두 그루쯤은 예사로 서있고 그 옆엔 돌무더기나 입석(立石),장승,당집 등이 역시 오색 헝겊을 두른 채 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각종 동제(洞祭)가 동고사,서낭제,장승제,산신제 등의 형태로 여전히 치러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증표다. 각 마을마다 전해내려오는 방식과 절차는 조금씩 다를지언정 그 목적은 한결같이 마을수호와 액운퇴치,소원성취가 주를 이룬다. 동제의 규모는 예전에 비해 많이 축소되긴 했으나 마을 주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체로서 이 지역의 오랜 풍습이자 순수한 삶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달래강은 또 수많은 이야기(설화)를 안고 흐른다. 가는 곳마다 세월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숱한 지명 유래와 인물·유적 관련 이야기들이 인근 주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뿌리 박은 채 전설 혹은 민담 형태로 목소리를 토해낸다. 최상류 발원샘에서부터 최하류 탄금대까지, 발을 딛는 곳마다 멈춰 서는 곳마다 할 얘기도 많고 들을 얘기도 많다. 오죽하면 달래강 명칭 유래에 얽힌 이야기만도 ‘정설’이 없을 만큼 갖가지요 물줄기가 지나는 곳마다 속리천,박대천,청천천,가무내,괴강,달천과 같이 부르는 이름이 각기 달라지는 강이 곧 달래강이다. 


달래강 지역엔 많은 세시풍속도 전해진다. 정월 초엔 세배와 덕담나누기,윷놀이를 하고 대보름엔 부스럼깨물기와 더위팔기,오곡찰밥 제사지내기,각종 풍물놀이 등을 하고 음력 이월엔 좀생이날 행사와 영등제를 통해 풍년농사를 기원한다. 또 삼월 삼짇날엔 산멕이를 통해, 사월 초파일엔 각자 절을 찾아 정성껏 치성을 드린다. 오월 단오날엔 마을단위로 놀이굿판을 열고 칠월 칠석엔 정한수 한 그릇에 무병장수를 기원 한 후 백중날엔 호미씻이를 통해 일꾼들의 노고를 위로한다. 팔월 한가위엔 조상 찾아 성묘하고 시월 상달엔 안택굿과 시제를 통해 천지 조상께 감사하며 동짓날엔 팥죽을 쑤워 먹고 섣달 그믐날엔 촛불을 밝혀 잡귀를 몰아낸다.


지금은 이같은 세시풍속들이 많이 쇠퇴했지만 최근 다시 열리고 있는 괴산 청천의 대보름날 행사와 불정의 백중놀이 행사는 달래강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달래강은 또 역사의 현장이다. 괴산군 청천면 후영리 농소마을의 고인돌과 칠성면 도정리의 고인돌 등 선사시대 유적을 비롯해 괴산읍 검승·제월리,  감물면 지장·창산·이담리, 충주시 이류면 문주리 등 곳곳에 남아있는 고려·조선시대 유적들 역시 달래강 사람들의 옛 숨결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달래강은 또 많은 생명체들을 보듬고 흐르고 있다. 수계 대부분이 산간지역을 흐르는 계곡형의 하천이기에 다른 수계에 비해 수질이 맑고 깨끗한 데다 주변 환경 또한 쾌적해 수많은 생명체들이 뿌리를 내리고 사는 ‘윤택한 삶의 보금자리’로서 독특한 생태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다.
 

 

 

 

 

 

 

 

 

 

 

 

 

 

 

 

 

 

 

 

 

 

 

 

 

 

 

 

 

■‘상생의 해’를 떠올리자

 

달래강의 서쪽 분수령인 한남금북정맥에 해가 기울고 있다. 지난 1월초 사전 취재에 들어간 지 꼭 12개월 만에 처음으로 ‘지는 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간 삼백리 물길을 답사하면서 전혀 느껴보지 못한 석양이다.


발걸음이 무겁다. 감히 1년간의 발걸음으로, 삼백리 물길에 담긴 모든 숨결을 지면에 담고자 했던 취재팀의 당초 욕심이 문득 떠오른다. 아쉬움이 크다. 그래서 미련이 남는다.


하지만 달래강의 해는 결코 지는 해가 아니다. 떠오르는 해다. 그만큼 달래강의 숨결은 건강하다.


또 하나 분명한 게 있다. 달래강엔 마침표가 없다. 남한강과의 합수지점인 탄금대가 달래강의 종착점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니다. 시작점이다. 남한강이라는 새로운 물흐름의 시작인 것이다.


그 옛날 서해를 출발한 소금배가 한강과 남한강을 거친 후 탄금대 옆을 지나 목도나루(괴산군 불정)를 향해 새로운 출발을 했듯이 또 하나의 시작점이 바로 달래강의 종착지다.


달래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다. 충북의 젖줄이자 지역민들의 삶의 터전이다. 그 안에 지역의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고 지역민들의 어릴적 추억과 꿈, 삶의 향기가 고스란히 배 있다. 또 그 품 안에는 각종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이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고 곳곳에 아름다운 절경과 명소가 깃들어 있다.

 

이러한 달래강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이 시대에 남겨진 숙제를 과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그건 단 하나 ‘달래강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숨결의 소중함을 지역민 스스로 지켜 나가면 된다. 달래강이 단지 지역발전을 위한 ‘개발의 대상’이 아닌, ‘상생의 대상’으로서 마지막 보루가 돼야 한다.


달래강은 어느 한 지자체, 어느 한 지역의 소유물이 아니다. 유역내 각 골짜기서 흘러내린 크고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들어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유기체인 달래강을 이루고 있듯이 유역내 구성원들이 스스로 힘과 뜻을 합쳐 지키고 가꿔나갈 때만이 소중한 자원으로서의 달래강이 보전될 수 있는 것이다.


달래강은 흐르고 있다. <끝>

골골이 새겨진 名詩 다양한 서체로 전해져
괴산호 중류에 이어진 갈은구곡 ‘仙境’
애한정엔 학동들 글읽는 소리 들리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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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호(칠성호) 유역은 한 마디로 구곡(九曲)의 연속이다. 그만큼 예전엔 주변 경관이 빼어났다는 증거다.

 

지금은 비록 물에 잠겨 ‘잊힌 절경’이 되었지만, 바위 위에 새겨진 명문(銘文)으로 그 존재를 추정할 수 있는 거차비구곡과 운하구곡이 상류 쪽에 있고 그 아래로는 최근 그 실체가 밝혀진 연하구곡이 늘어서 있다.

 

또 괴산호 중류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갈론계곡에는 역시 최근에 실체가 밝혀진 갈은구곡이 ‘괴산호의 제2장’처럼 펼쳐져 있으니 이 어찌 구곡의 연속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갈론마을 위쪽에 있는 갈은구곡은 제1곡 갈은동문(葛隱洞門)을 시작으로 2곡 갈천정(葛天亭), 3곡 강선대(降仙臺), 4곡 옥류벽(玉溜壁), 5곡 금병(錦屛), 6곡 구암(龜岩), 7곡 고송유수재(古松流水齋), 8곡 칠학동천(七鶴洞天), 9곡 선국암(仙局암)에 이르는 일련의 절경들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 곳 역시 각 곡마다 바위에 새겨진 한시가 전하니 이것이 곧 갈은구곡시(葛隱九曲詩)다.

 

 

갈은동 3곡 ‘강선대’

갈은구곡을 최초 설정하고 시를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으나 구곡 내 바위에 전덕호(全德浩), 홍승목(洪承穆-홍명희의 할아버지), 이원긍(李源兢)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9곡에는 사노동경(四老同庚)이란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앞의 세 사람 중 한 사람이거나 그와 친한 동갑내기 네 명이 관련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갈은구곡과 갈은구곡시의 특이한 점은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9곡 선국암에 실제로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는 것과 각 곡마다 새겨진 한시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수의 외형적 형상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표현했으며 새겨진 서체 또한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향토사학자 이상주씨(괴산향토사연구회·극동대 외래교수)는 “갈은구곡을 설정하고 시를 지으며 어울렸던 사람들은 노장사상과 신선사상, 선인일치(仙人一致) 사상 뿐만 아니라 주자학적 학문도 겸비하고 다양한 서체까지 섭렵한 고고한 시인묵객들”이라며 “따라서 갈은구곡은 이들이 이룩한 중요한 문화유산이자 한시 학습의 야외강의실이요, 서체 연구의 자연학습장”이라고 평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옥녀봉 아래의 9곡 선국암에 새겨져 있는 한시를 보자.

 

‘玉女峰頭日欲斜(옥녀봉 산마루에 해는 저물어가건만)/ 我棋未了各歸家(바둑은 아직 끝내지 못해 각자 집으로 돌아갔네)/ 明朝有意重來見(다음날 아침 생각나서 다시금 찾아와 보니)/ 黑白都爲石上花(바둑알 알알이 꽃되어 돌위에 피었네)’(이상주 역)

 

기막힌 표현 아닌가. 전날 놓아두었던 바둑알이 모두 꽃으로 변해 돌위에 피어있단다.

 

선국암의 마지막 싯귀에 감명을 받아서인지, 한참을 앉았다 돌아서는 발길이 잘 떨어지질 않는다.

 

몇 번을 뒤돌아 보며 가까스로 빠져나온 계곡 입구에 또다시 괴산호의 푸른 물결이 햇빛에 반짝인다.
 

선경(仙境)을 지나 이곳에서 달래강 본류와 합쳐진 계곡물이 곧바로 푸른빛을 띤다. 그 맑디 맑던 유리알 물빛이 괴산호를 만나면서 금새 푸르게 변하는 것을 보니 변화무쌍한 물의 인생이 느껴진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융화할 줄 아는 물의 섭리리라. 먼 옛날 갈은구곡을 찾아 감흥을 노래하던 시인묵객들도 두 물이 스스로 합쳐지는 것을 보고 이러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괴산호는 물흐름이 빠르다. 다른 호수 같으면 몇날 며칠이고 머물렀다 흐르련만 괴산호의 물은 성급히 흐른다. 댐이 세워질 때부터 발전 전용댐으로 지어진 데다 규모 또한 매우 작게 설계됐기 때문이다.
 

 

20~30km 떨어진 상류 쪽 물이 댐 수위에 미치는 영향이 불과 한 나절이면 나타나 곧바로 수문 조작에 들어가야 한단다. 홍수조절 기능이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다.

 

 

괴산댐 방류
발전 전용댐인 괴산댐은 홍수조절 기능이 거의 없어 상류 쪽에 웬만한 비가 오면 수문을 열고 방류한다.

괴산호의 물이 댐을 벗어나려면 두 개의 수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하나는 발전용 취수구를 통과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댐위에 세워진 7개의 수문을 통해 낙하하는 길이다. 평상시 대부분의 물은 발전용 취수구를 통해 흘려보내지지만 홍수때에는 댐 위의 수문을 통해 방류된다.

 

수문을 여는 갯수는 댐 상류 쪽의 유입량에 따라 달라지는데 올해 7개의 수문을 모두 연 것은 지난 7월 25일 단 한 번 뿐이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댐 수문을 통해 흘려보낸 최대 유하량은 지난 1980년 대홍수시 기록한 초당 5300톤이다. 당시 댐 위 오른쪽 공도교(댐을 공용도로로 사용토록 설계한 다리)를 3.15m나 월류했다고 하니 가히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내렸는지 짐작이 간다. 이 때 댐 주변건물이 완전 유실되고 본관과 주기기가 침수피해를 입어 1999년부터 6년간 대대적인 복구공사를 한 바 있다.

 

댐을 벗어난 달래강물은 또다시 ‘괴강’이란 이명으로 불려지면서 외사교를 지나 두천리서 지류인 쌍천과 합류하는데 합류장면이 매우 특이하다.

 

즉, 하나의 큰 제방 안으로 두 물이 흘러들되 곧바로 합류하는 게 아니라 1km 가량을 근접해 나란히 흐르다가 두천2리 앞에서야 드디어 하나의 물이 되는 것이다. 두천리란 이름은 ‘두 물’이 나란히 흐르다 만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되는데 한자로는 생뚱맞게도 ‘杜川’이다. 

 

 

‘두 물’로 흐르는 괴강

괴산댐을 지난 괴강은 몸을 추스리며 잠시 흐르다 지류인 쌍천과 만나는데 그 장면이 매우 특이하다.  즉, 하나의 제방 안으로 두 물이 흘러들어 곧바로 합류하는 게 아니라 1km 가량을 근접해 흐르다가 두천2리 앞에서야 드디어 하나의 물이 된다. 위로 보이는 ‘맑은 물’이 쌍천이다.

두천리를 지나면 이내 왼쪽으로 거대한 절벽 밑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이 괴산의 명소이자 매운탕집과 횟집들이 밀집한 괴강다리와 느티여울(槐灘)이다.

 

느티여울 옆 검승리 정자말 언덕에는 지금도 학동들의 글읽는 소리가 들려올 듯한 옛 정자가 느티나무 숲에 고즈넉히 들어앉아 있는데 이 곳이 괴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린다는 애한정(愛閑亭)이다.


지방유형문화재 50호인 애한정은 조선 선조때 유현(儒賢) 박지겸 선생이 세상을 피해 지내던 곳으로 애한정(큰애한정) 앞에는 현재 동몽선습비가 세워져 있다. 동몽선습은 박지겸 선생의 할아버지인 박세무(朴世茂) 선생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용교과서로서 박지겸 선생은 바로 이곳 애한정에 내려와 학문을 연구하며 때론 아이들을 불러모아 동몽선습을 가르침으로써 후학양성에도 힘썼던 것이다.

 

 

애한정 대문에서 바라본 괴강
애한정은 현재 두 채가 있는데 윗채가 조선 현종때 옮겨지은 큰애한정이고 아랫채가 본래의 원애한정이다. 원애한정 대문에서 괴강을 바라보니 괴산~연풍간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달래나 보지…" 슬픈 남매 사연 담은 설화 대표적
물맛 좋아 달천(甘川), 수달 많이 살아 수달천(獺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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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달천)은 사연이 참 많다. 특히 명칭 유래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와 기록이 전한다.

 

우선 충주를 중심으로 널리 알려진 달래강 설화부터 들어보자.


"먼 옛날 친남매가 길을 가다 소나기를 만났다. 때는 여름인지라 앞서가던 누나의 얇은 옷이 비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뒤따라가던 남동생은 어쩔 수 없이 누나의 드러난 몸을 보게�고, 순간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심성이 착했던 남동생은 자신이 엉뚱한 생각을 한 게 죄스러워 그만 돌로 아랫도리를 쳐 죽고 말았다.
한참 뒤 남동생이 따라 오지않는 것을 안 누나가 이상히 여겨 되돌아가보니 아뿔사, 동생이 아랫도리에 피를 흘리며 죽어있지 않은가. 이를 본 누나는 그제서야 전후사정을 알아채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하는 말이 '차라리 달래나 보지, 말이나 해 보지…' 그랬다는 것이다."


이같은 슬픈 얘기가 전해지면서 그때부터 달래강이란 이름이 생겼고 누나가 동생을 끌어안고 통곡한 곳은 달래고개라 불렀다 한다.

 

다음은 달천에 관한 유래다.


때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게 됐는데 이 때 이여송이 명군의 장수로 들어오게 됐다. 이여송의 아버지(이성량)는 본래 조선사람이었으나 철령위로 도망가 살았기에 이여송 역시 근본이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망각한 채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며 중요한 혈을 끊는 등 만행을 일삼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여송 휘하의 한 장수가 충주지역을 지나다 갈증이 나자 맑게 흐르는 강물을 마셨는데 그 물맛이 달고 좋아 감천(甘川)이라 한 것이 훗날 달천으로 변했다고 한다.


물맛이 달고 맛있다는 뜻의 또다른 이명으로는 단냇물, 달냇물 등이 있으며, 충주 인근의 달천동,단월동,단호사와 같이 '달' 혹은 '단'자가 들어간  지명은 한자어에 상관없이 모두 '단 물맛'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또 일설에는 동국여지승람에 달천(獺川)으로 표기돼 있는 점을 들어 본래 이 강에는 예부터 수달(獺)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수달내라는 뜻의 달천(獺川)으로 불리다가 후에 '달' 자가 채음돼 달래강(達川)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달래강 인근에서는 조선초부터 수달피가 진상됐다는 얘기가 전한다.


달천과 관련된 다른 기록으로는 이중한의 택리지에 '속리산 정상에서 동으로는 낙동강, 서로는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며 북으로는 충주의 달천(達川)이 되어 한강으로 흘러든다'고 적혀있다. 또 조선시대 동람도에는 충주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산천,덕천,달천(獺川)으로 각각 표기하고 있어 당시에도 달천이란 이름과 함께 여러 명칭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덕을 입은 강, 즉 덕천(德川)이란 이명도 전한다. 조선시대 벌미란 마을의 한 사내가 자신의 집으로 탁발 온 스님의 권유에 따라 달천에 징검다리를 놓았는데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병자(病者)가 다리 덕에 목숨을 건지게 되자 그 병자를 업고왔던 노인이 '과연 덕을 입은 강이로구나(於是 彼德之川也)' 한 것이 전해져 덕천이란 이름이 생겼다 한다.

 

달래강은 지금도 지역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최상류인 보은 속리산지역에선 속리천, 청원 금관~어암리 부근에선 박대천, 괴산 청천부근에선 청천강 혹은 가무내(현천), 괴산읍 부근에선 괴강(槐江) 등으로 불리다가 충주시 달천동에 이르러서야 달래강이 된다.


속리천은 발원지인 속리산에서 이름을 따왔고 박대천은 인근 어암리(충북 청원군 미원면)의 박대소(沼)에서 유래됐으며, 청천강은 괴산 청천지역을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청천지역, 특히 화양동 부근에서 불리는 가무내는 '검은 내(현천.玄川)'란 뜻으로 인근 강바닥이 검은 바위와 돌로 돼 있어 물이 검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괴강은 괴산지역 주민들이 특히 달래강을 대신해 부르는 이름으로 괴산(槐山)의 '괴(槐)' 자를 따왔다.

 

 

�달래강의 다른 이름 '박대천'
달래강은 지금도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최상류인 속리산 부근에선 속리천, 청원 미원 부근에선 박대천, 괴산 청천부근에선 청천강 혹은 가무내(현천), 괴산읍 부근에선 괴강(槐江) 등으로 불린다.

< 청천천의 겨울>

 

 <가무내(현천)의 봄 전경>

 

<속리천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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