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도 의사표현을 한다.

평화로울 땐 노래도 부르고 위급하면 경계신호도 보낸다.

슬픈땐 울부짓기도 하고 배고프면 보채기도 한다. 또 몸짓을 통해서도 의사를 소통한다.

조류학자가 꿈이었던 필자는 어릴 적 유난히도 새를 좋아했다.

오죽하면 등교하다가도 처음 보는 새를 만나면 호기심에 따라가 기필코 둥지를 발견한 후 새알 모양과 특징 등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학교가는게 다반사였을까.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새소리만 듣고도 종류는 물론 그 새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쯤은 대강 안다.

중학교때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날 걸어서 집에 가는데 도랑을 만났다.
풀이 우거진 도랑을 풀쩍 뛰어 건너는 순간 발밑에서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다.

뭔가가 '꽥∼'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뒤로 나자빠져 허우적거리는 게 아닌가. 기겁을 한 후 돌아서보니 해오라기였다.

건너뛰기전 풀에 가려 보이지 않던 해오라기가 갑자기 뛰어든 불청객에 놀라 그만 까무러쳤던 것이다.

그 일로 새들도 된통 놀라면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친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1살 어린 나이에 겁도 없이 30m가 넘는 동네어귀 미루나무에 올랐다 죽을 뻔한 일이다.

빈 까치 둥지에 부화한 어린 참새새끼가 탐이 나 며칠을 벼른 끝에 어른들이 들로 나간 틈을 타 나무에 올랐다.

처음부터 심상찮은 경계음을 내던 참새어미들은 어린 꼬마놈이 둥지 가까이 이르자 더욱 큰 소릴 내며 덤벼들 태세였다.
이윽고 손을 내밀어 둥지에 넣는 순간 작대기만한 황구렁이가 혀를 낼름거리며 불쑥 머리를 내미는 게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떨어질 뻔했지만 어디서 생긴 호기인지 되레 손으로 뱀머리를 내리치곤 똥줄이 빠져라 내려왔으니 지금도 생각하면 등줄기가 오싹하다.

그일 이후 새들은 상황에 따라 경계음을 달리 낸다는 걸 알았다.

새소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이른바 'SONG'과 'CALL'이다.

SONG은 말 그대로 노랫소리, 즉 평화스런 지저귐이다. 산란기를 맞은 암수컷이 서로 구애하거나 세력권을 표시할 때 내는 본능적인 의사표현이다.
반면 CALL은 SONG 이외의 소리, 즉 의사소통을 위한 사회적 언어다.
천적이 가까이 있거나 침입할 때의 신호음 또는 놀라서 내는 비명소리, 먹이를 달라고 조르는 소리, 무리를 지을 때 통일성을 가지려고 주고받는 소리가 포함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새들의 CALL 같은 불만의 목소리가 들끓고 있다.

집권층의 소통의 부재가 빚은 민중들의 CALL이 촛불축제와 시위를 통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오로지 재협상만이 쇠고기 수입문제의 해법이라 외쳐대는 어린 학생과 학부모들의 생존권적인 CALL, 온갖 악재로 생계를 위협받아 농기구 대신 피킷을 들고 나선 농민들의 한맺힌 CALL, 대운하 계획 등 무모한 정책을 즉각 중단하라는 환경론자들의 결사적인 CALL, 초고유가로 더이상 생업을 잇지못하겠다는 화물업계의 절규의 CALL 등 목소리도 다양하다.

하지만 이들 보다 더 무서운 CALL이 있다.

집단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속앓이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소리없는 CALL'이다. 그들이라고 어찌 나서고 싶지 않고 소리내어 외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침묵할 따름이다.

가슴에 응어리 지고 피가 맺혀도 이 땅에 '평화의 SONG'이 울려퍼지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그들은 희망한다. 민심 달래기에 급급한 임기응변식 사탕발림이 아닌, 소통을 통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진정 원한다.

가슴을 열고 생각해 보라.

새들은 해맑게 SONG을 부르는데 우리사회는 왜 CALL이 만연하는지.

하늘 보기가 민망하잖은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