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는 소를 버리고 역사는 풍경을 잃었다

 
 중국 갑골문엔 쟁기그림이 있다. 힘 력(力)을 뜻하는 상형문자다. 그 시기는 사람의 노동력으로 농사짓던 때여서 쟁기질 하려면 당연히 힘이 필요했기에 쟁기는 곧 힘의 상징이었다.

   고대중국인들은 또 여럿이 힘을 합하는 것을 쟁기 3개로 표현했다. 이것이 훗날 ‘힘합할 협’자가 됐는데 발상이 기막히다. 쟁기 한 둘 보단 세 개로 땅을 갈면 훨씬 쉽게 일을 마칠 수 있었기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중국의 갑골문보다 앞선 이집트 상형문자에도 쟁기가 나타난다. 쟁기의 역사가 매우 오래됐음을 시사한다. 학자들은 이들 상형문자를 들어 서양에선 BC 4000년께, 동양에선 BC 3000년께 쟁기가 출현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쟁기의 출현은 농업발전사에서 가히 혁명적인 일이다. 나뭇가지나 타제석기 혹은 괭이와 따비로 농사 짓던 구문명에서 새로운 문명사회로 접어들게 한 일대 사건이다. 일부에선 쟁기를 원시자연사회서 문명사회로 전이케 한 상징물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선 어느 시기에 쟁기가 도입됐을까. 북한에선 평북 염주서 출토된 유물을 들어 BC700년께로 주장하나 남한에선 믿지 않는다. 대전 괴정동 출토 농경문(農耕紋) 청동기에 따비로 땅 가는 모습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경문이 그려진 그 시대(청동기시대)엔 아직 쟁기가 사용되지 않았고 다만 삼국유사 신라 유리왕조에 처음으로 쟁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을 들어 삼국시대로 보고 있다.

 쟁기 이후의 또 다른 혁명은 소를 이용한 쟁기질, 이른바 우경법의 시작이다. 중국에선 BC 3세기경에, 우리나라에선 신라 지증왕 3년(502년)에 우경이 시작됐다. 중국에선 이집트의 쟁기가 전래된 지 27세기 여만에, 우리나라에선 중국으로부터 쟁기가 들어온 지 4세기만의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농업발전사의 판도가 뒤바뀌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경운기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다. 이상야릇한 기름냄새와 함께 딸딸딸 거리는 낯선 기계음이 1960년대 이후 우리 농촌에 울려퍼지면서부터 꿈에도 못 그리던 기계화 영농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후 불과 반세기만에 우리 농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웬만한 농가는 수천만원이 넘는 트랙터를 갖게 됐고 이앙기,관리기 등 각종 농기계가 소와 사람을 대신하게 됐다. 우경법이 도입된 지 15세기 만에 우경 발상국을 능가하는 선진 기계화영농국이 됐다.

 반면 변한 것들도 많다. 모내기철이 와도 들녘에선 풍악과 농요가 들리지 않고 여러 사람이 품앗이하는 모습도 사라졌다. 좁은 논두렁을 곡예하듯 밥광주리 이고 가던 시골 아낙의 애잔한 모습이 사라진 대신 자장면과 식당밥을 실어나르는 오토바이, 밥차가 시멘트포장 농로를 숨가쁘게 드나든다. 숭늉 대신 전화 한 통에 배달된 다방커피로 입가심하고 걸쭉한 막걸리 대신 PET병에 담겨진 생맥주로 농심을 달랜다.    
 모내기철 생태달력도 달라졌다. 기계화 영농으로 모내기철이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예전엔 보리이삭이 다 익을 즈음 모를 냈는데 지금은 보리밭이 푸르스름할 때 모내기를 한다. 무논 형태도 달라졌다. 예전보다 훨씬 작은 모를 기계로 심게 되면서 무논 깊이가 눈에 띄게 얕아졌다. 일년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문전옥답도 가치를 잃었다.

 워낭소리와 함께 사라진 농부들의 소몰이 소리도 빛바랜 추억이 됐다. 해서 어느 시인은 우리농촌의 잃어버린 풍경을 이렇게 읊는다.
 ‘새벽 안개에 쇠똥냄새 배어나면/할아버지는 삽작문을 나섰다/외양간에는 녹슨 쟁기,소는 보이지 않는다/소는 외출 중/갈빗살과 차돌박이로 분류된 지 오래이다/농부는 소를 버렸고/소는 쟁기를,역사는 풍경을 잃었다’고….

 지금 농촌은 (芒種)이다


 옛말에 '불 때던 부지깽이도 거든다'는 말이 있다.

또 '발등에 오줌 싼다'는 말도 있고 '별 보고 나가 별보고 들어온다'는 말도 있다.

모두 망종(芒種) 절기 때 나온 말이다.

망종 때 오죽 바빴으면 부엌에서 불 때던 부지깽이까지 나서서 사람 일손을 돕고, 일 하다가 바지춤을 내리기도 전에 발등에 오줌을 쌌을까.

가뜩이나 짧은 밤 제대로 잠 한숨 못 자고 별 떠 있을 때 일터에 나가 또 다시 별이 떠야 집으로 돌아오는 심정은 또 어떻고….

 

망종은 가시래기 망(芒) 자와 씨 종(種) 자가 합해서 이뤄진 말이니, 말 그대로 가시래기(까끄라기)가 있는 종자를 거둬들이는 철, 즉  보리 수확철을 일컫는다.

예전 경운기는 물론 트랙터도 없이 모든 일을 소나 사람 손으로 해야 했을 땐 보리 수확기가 일년 중 가장 바쁜 시기였다.

보리의 특성상 제 때 베지 않으면 대공이 쓰러져 손실이 많고 수확하기도 쉽지 않다. 또 보리를 얼른 베어내야 이모작으로 모내기도 하고 콩과 같은 다른 작물들도 심게 된다.

농사란 게 시기를 놓치면 모두가 폐농하게 되니 잠시도 헛눈을 팔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베어낸 보리는 일일이 손으로 타작을 해야만 했으니 일이 끝이 없었다.

볼 일 보고 뭐 볼 시간도 없다는 말은 이런 때를 두고 한 말이다.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고, 내 일 하다보면 남의 일 해야 하는 품앗이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끊임없이 이어져 일손 멈추는 것을 잊는다고 芒種을 다른 말로 亡終이라고도 했다.

끝을 잊었다는 얘기다.

 <사진설명> 농촌을 지키고 있는 우리네 어머니들이 산골다랑이 논에 늦모내기를 하고 있는 장면. 6월 3일 전북 무주 내도리 입구에서>

 

작가 이문구의 동시 「오뉴월」은 망종 때의 바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엄마는 아침부터 밭에서 살고/ 아빠는 저녁까지 논에서 살고/ 아기는 저물도록 나가서 놀고/ 오뉴월 긴긴 해에 집이 비어서/ 더부살이 제비가 집을 봐주네."

집이야 어찌 됐든 일부터 해야하니까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제 일을 하다가 저녁 늦게서야 만나는 농촌의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

어릴 적 농촌에서 자란 40대 이후의 사람들은 이러한 정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늦잠 자고 일어나면 엄마 아빠는 보이지 않고 방 한 구석에 차려진 초라한 밥상을 혼자서 대해야 했던 그 시절.

집에서만 놀기가 따분해 엄마 아빠가 있는 일터를 찾아가면 바쁜데 왜 찾아와 귀찮게 하느냐고 면박 아닌 면박을 받았던 기억과 함께….

바쁠 땐 있는 집 애들이나 없는 집 애들이나 다 같이 찬밥 신세였으니 끼리끼리 모여 해 가는 줄 모르고 노는 게 하루 일과였다.

소꿉놀이에 풀장난 흙장난 하다보면 옷은 옷대로 얼굴은 얼굴대로 온통 시커멓게 돼 까마귀 새끼나 진배없었다.

 

예전의 그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망종 절기가 돌아왔다.

현충일인 6일이 망종이니 이 날부터 하지(22일) 전까지가 이른바 망종 절기다.

망종 절기를 맞은 농촌은 지금 무척 바쁘다.

예전처럼 보리 농사를 많이 짓지 않는 데다 농사일도 트랙터나 이앙기 같은 농기계가 대신 하니 발등에 오줌 쌀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장 바쁜 철임엔 틀림없다.

모내기를 아직 못한 곳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모를 낸 곳도 제초제 뿌리랴 비료 주랴 밭작물 손보랴 하루해가 짧다.

담배나 고추 농사 짓는 농가는 더없이 바쁘다.

담배의 경우 제 때에 잎을 따야 빛깔이 잘 나고 고추는 장마철 오기 전에 말목 박아 탄탄히 해놔야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고 잘 견뎌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농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은 이 참에 한번쯤 고향에 들러 일에 지친 꼬부랑 노인네들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 도리인 듯 싶다.

명절 때만 찾아갈 것이 아니라 부지깽이 도움이라도 받고 싶은 요즘 고향을 찾아 함께 농약 치고 고추 말목 하나라도 박는 게 더 큰 보람이 있으리라.

농촌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그들을 도와주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있으면 아이들과 함께 농촌에 들러 '망종'이란 말이 왜 생겨났는지, 그 유래와 의미도 일러줘 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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