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댐에 묻힌 옛절경 반세기 만에 모습 드러내
‘雲霞洞門(운하동문)’ 암각 문귀 최초 확인 개가
거치비 마을 유래된 우암 송시열 글씨 물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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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 물길 3백리 가운데 물흐름이 ‘노루 모가지’ 형국을 한 곳은 무척 많다.

 

하지만 마을 이름이나 지명으로서의 노루목으로 불리는 곳은 괴산군 청천면의 노루목과 충주시 살미면의 노루목 뿐이다. 이들 두 곳의 지형은 모두 물줄기가 노루목처럼 휘돌아 흐른다는 공통점 외에도 물살이 비교적 센 여울을 이루며 굽이친다는 점이다.


달래강의 윗 노루목, 즉 청천면 관내의 노루목을 빠른 물살로 줄행랑 치듯 휘돌아 나온 물길은 예전 ‘덕평 유원지’라 불리던 거봉리 앞 강변에서 잊혀졌던 옛추억을 되새기며 굽었던 허리를 곧게 편다. 이곳 덕평 유원지는 지난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철이면 청주 등 인근에서 물놀이를 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항시 북적였으나 지금은 화양구곡과 선유구곡, 청천 뒤뜰숲 등 숲과 그늘이 있는 곳으로 손님(?)을 빼앗겨 점차 퇴색해 가는 옛명소로 변해 버렸다.

 

거봉리에서 추억을 털고 일어선 물길은 다시 거봉교를 지나 덕평에서 지촌을 잇는 덕평1교를 향해 푸른 비단을 곱게 펼친다. 조금 전의 지루하던 곧은 물길과는 딴판이다. 거봉교서 덕평1교 방면으로 절벽을 끼고 굽이치는 달래강의 모습이 가히 절경이다.

 

거봉교 아래 절벽밑으로는 자라들이 햇볕을 쐬느라 자주 출몰하던 자라바위들이 빼곰히 머리를 들고 올라와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자연산 자라를 잡기 위한 싹쓸이식 남획이 성행하면서 지금은 예전처럼 많이 올라오질 않는다고 한다.

 

달래강의 여름
괴산군 청천면 거봉교 부근의 여름 풍경. 왼쪽 절벽아래로 ‘자라바위’들이 즐비하게 있으나 최근 남획으로 바위 위로 올라오는 자라 숫자가 크게 들어들었다.


거봉교와 덕평1교는 이 근처에서 가장 높게 세워진 신설교로서 높은 다릿발과 관련해 지금도 많은 얘기가 오가고 있다.

 

이들 다리가 건설될 당시인 2000년을 전후해 가칭 ‘달천댐’이 새로 들어선다느니, 기존 괴산댐을 확대 증설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나돈 이후 걸핏하면 댐 건설 얘기가 들리곤 했는데 그 때마다 호사가들은 높게 세워진 이들 다릿발을 증거물인 양 들먹이며 마치 사실처럼 말해오고 있는 것이다.
 

덕평1교가 세워진 양쪽 강변으로는 새마을운동이 물결치던 지난 1970년대 중반까지도 나룻배가 있어 덕평리와 지촌, 사기막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먼 이야기’가 됐다.


거봉교에서 덕평1교 사이의 구간은 매년 여름 장마철만 되면 하류쪽 괴산댐의 영향으로 수위가 올라가는 사실상의 댐 상류에 속한다. 따라서 이 구간부터 최소한 댐 직하부(괴산군 칠성면 외사·송동리)까지는 괴산댐 건설로 인해 나타난 각종 영향을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괴산댐 최상류 전경
괴산댐 최상류쪽인 덕평1교 부근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 지역에 머물면서 직접 썼다는 ‘거차비 동문(去此非 洞門)’이란 글귀가 암각돼 있다고 하나 지금은 물에 잠겨 확인할 길이 없다. 


괴산댐은 조선전업주식회사(한국전력공사의 전신)가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에 지난 1952년 착공, 5년만인 1957년 준공한 댐으로 비록 규모는 작지만  순수한 국내 기술진에 의해 조사,계획,설계,시공된 최초의 발전 전용댐이다.

 

지금은 괴산댐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지만 예전엔 수전댐, 칠성댐, 외사댐 등으로도 불렸으며 댐내 호수, 즉 괴산호는 괴산군 칠성면과 문광면, 청천면 등 3개 면에 걸쳐 있다.


댐의 유역면적은 671㎢, 총저수용량은 1500만톤으로 댐 치고는 많지 않은 양이다. 하지만 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역 안에는 최근 그 존재가 밝혀진 ‘연하구곡’ 등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던 옛 계곡들이 수많은 문화유적과 함께 물에 잠겨있으며 댐 조성에 따른 생태변화 등 자연환경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댐 건설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댐내 잊혔던 구곡들을 재조명하고 나아가 생태계에 나타난 각종 변화들을 되짚어보기 위해 수 차례에 걸쳐 댐유역을 현지 답사했다.


필자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댐 최상류쪽인 덕평1교 부근의 동쪽 절벽으로, 이곳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 지역에 머물면서 직접 썼다는 ‘거차비 동문(去此非 洞門)’이란 글귀가 암각돼 있다고 하는 곳이다.

 

필자가 다른 곳을 재켜두고 이곳을 먼저 찾은 이유는 인근에 있는 지촌리의 ‘거치비’ 마을 이름이 이 글귀의 ‘거차비’에서 유래됐을 만큼 상징성과 역사성이 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암 선생이 ‘가히 한번 가볼 만한 곳’이라고 바위에 글자까지 새겨가며 감탄했던 이 지역의 대표적인 옛명소였기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현지 어부의 도움으로 배까지 빌려타고 찾아간 취재팀은 이 일대를 이 잡듯 뒤지며 암각된 글자를 찾아 헤맸으나 끝내 확인하지 못한 채 현지 주민인 박래성씨(81)로부터 “물속에 잠겨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만 듣고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더욱이 아쉬움을 더한 것은 ‘동문(洞門-물가의 절경 혹은 경승지의 입구란 의미로서 특히 구곡과 같은 연이은 절경의 첫 번째 절경에 흔히 붙임)’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는 증언으로 보아 예전엔 이 일대를 중심으로 빼어난 절경이 강을 따라 줄줄이 이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이렇다할 절경이 남아있지 않아 상전벽해의 무상함을 다시금 느껴야만 했다는 점이다.

 

달래강의 겨울풍경과 운하동문 글귀

괴산댐 최상류 운교리 부근의 겨울풍경이 색다른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원내는 취재팀이 최초로 찾아낸 ‘운하동문’ 암각글자로 사진의 물굽이 친 절벽 부근 바위에 새겨져 있다. 

 

운하구곡의 사모바위
바위절벽 위에 생뚱맞게 올려진 바위 모습이 전통혼례때 신랑이 쓰는 사모와 비슷하다해서 사모바위라 이름 붙여졌다고 하나 얼마 전 외지인들이 올라가 사모를 훼손하는 바람에 ‘어색한 사모바위’가 돼 버렸다. 원내가 훼손된 사모 부위.

 

‘거차비 동문’의 존재를 증언해 준 박래성씨


이러한 아쉬움은 두 번째로 찾아간 운교리앞 절벽에서도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다만 이곳 절벽에서는 배를 빌려준 여영희씨(현지어부·운강식당 운영)의 도움으로  ‘운하동문(雲霞洞門)’이라고 암각된 네 글자를 최초 확인하는 보람을 얻었지만, 이 일대 역시 댐 조성후 변해진 물길로 옛정취는 찾아볼 수 없고 현대적인 댐 풍경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운하동문 글귀가 암각된 산자락을 끼고 운교리앞을 벗어날 즈음 수십길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나타나는데 이곳이 그 옛날 운하구곡의 마지막 절경으로 추정되는 사모바위다. 바위절벽 위에 마치 눈사람의 머리처럼 생뚱맞게 올려진 바위 모습이 전통혼례때 신랑이 쓰는 사모와 비슷하다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하나 얼마 전 외지인들이 올라가 사모를 훼손하는 바람에 ‘어색한 사모바위’가 돼 버렸다.

 

거봉교 아래의 겨울 풍경(왼쪽)과 여름 풍경 비교

백로담의 슬픈 사연에 물길마저 통곡하듯 굽이치고ㆍㆍㆍ

용추골 내 용추폭포 하얀 물줄기 절경 이뤄
가무내 명칭 금송아지(金牛) 전설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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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경 이룬 용추폭포
용추골 안에 있는 용추폭포는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과 함께 지금도 바위 주변에 용발자국이 남아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바위 위에서 떨어진 옥수(玉水)가 2단으로 펼쳐지며 절경을 이룬다.  


장마전선이 물러가니 하늘빛도 산천빛도 다 새롭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무섭게 요동치던 강물도 2~3일 지나니 언제 그랬냐며 수줍은 몸짓이다.

 

막무가내로 쏟아지는 장대비에 잠시 날갯짓을 사리던 물잠자리도 더욱 말쑥해진 차림이고 비가 그치면서 훨씬 높아보이는 푸른 창공엔 황조롱이 새끼가 비행술을 익히느라 이리저리 어지럽다.


괴산군 청천면 신도원에서 도원을 비껴 현천다리(도원교)에 도착한 강물은 또 한번 ‘가무내’란 명칭으로 이름갈이를 한다. 가무내는 말 그대로 ‘검은 내(현천·玄川)’란 뜻인데 이 지역을 중심으로 강바닥에 검은 바위와 돌이 많이 깔려있고 도원교 바로 아래엔 수심 깊은 소가 있어 항상 강물이 검게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지만 이는 현대적인 해석일 뿐 그 어원은 다른 데 있다.


괴산 청천지역 향토사학자인 김사진씨(60ㆍ전 괴산군 의원)에 의하면 예전에 이곳 물가서 금송아지가 나온 이래 쇠 금(金)과 소 우(牛) 자를 써서 ‘금우내’로 부른 것이 차츰 감우내→가무내로 변했다가 한자 지명으로 바뀌면서 현천이 됐다는 것이다.


이 가무내란 이름은 현 도원교가 세워진 부근(화양2리)의 지명이기도 하지만 이곳을 중심으로 한 달래강의 또다른 이름으로도 불러진다. 

금송아지(金牛) 전설을 안고 흐르는 가무내의 봄풍경.


어쨋거나 유난히 검게 보이는 하천바닥을 급한 물살로 지나친 가무내(달래강)는 현천다리 바로 아래서 커다란 소를 이루며 까불까불 다시 한번 몸을 추스린 뒤 이내 화양1리 청소년수련원 뒤편으로 흘러 지류인 화양천과 몸을 섞는다.


화양천은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경북 도계(백두대간 마루금)서 발원해 송면에서 선유동쪽의 관평천과 만나 화양계곡을 거쳐 흘러드는 지류를 말하는데 비가 온 뒤끝이라 수량도 많고 물빛도 유리알 같은 게 본류인 가무내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달래강 지류는 추후 별도로 보도 예정)


화양천을 만나면서 더욱 힘이 솟구친 가무내는 그야말로 바위 투성이인 마당바위 구간을 통과하면서 온갖 번뇌 다 토해낼 것 같은 하얀 몸부림을 친다.

 

달래강 전 구간이 암반으로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하상에 돌과 바위가 많이 깔려있지만, 이 구간은 특히 커다랗고 시커먼 바위가 빼곡히 들어차 있어 색다른 경관을 이루는데 그 중에서도 백로담 직전의 마당바위 부근이 가장 빼어나다.


이 구간은 또 절경도 절경이지만 ‘달래강의 숨결’ 취재팀이 수 개월째 추적하고 있는 ‘수달’이 가장 많이 서식하고 있는 수역으로 오죽하면 어부들도 그물을 치길 꺼려하는 요주의(?) 지역이기도 하다.(수달의 서식현황을 비롯한 달래강의 생태도 추후 상세 보도 예정)


이날 역시 돌위에 나보란듯 흔적을 남긴 수달똥을 집어들고 버릇처럼 냄새를 맡으며 물길을 따라 내려 가다가 며칠전 만났던 이 동네 어부를 다시 만나 ‘심한 수달얘기’를 듣게 됐는데 그 어부 왈, “엊그제 그물을 쳤더니 그물을 채곡채곡 쌓아놓은 게 마치 사람이 걷어놓은 것처럼 해놓고 물고기는 한 마리도 남겨두질 않았다”며 억울해 미치겠다는 표정이다.

 

수달 서식지

 마당바위 부근에는 수많은 바위와 강물이 어우러져 달래강 특유의 경관을 빚고 있다. 특히 이 구간은 ‘극성스러울 만큼’ 수달이 많이 서식하는 곳으로 어부들마저 그물 치길 꺼리는 수달천국이다.   

내심 반가운-어부들이 들으면 몹시 서운해할- 얘기지만 애써 표정을 감추고 도착한 곳이 후영리 백로담이다. 얼핏 듣기로도 범상치 않은 지명이 또 한번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백로담은 마당바위를 지나 후영교 부근의 커다란 물굽이를 이루는 지역을 일컫는데 예전엔 이곳 절벽 노송에 백로 서식지가 있어 강의 푸른 못(담ㆍ潭)과 함께 멋진 조화를 이뤘다고 한다.


백로담과 관련된 전설을 들어보자.

 

옛날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부하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는데 산세가 수려한 데다 백로가 많이 찾아오고 동네마저 부촌인 지라 훗날 큰 인재가 날 것을 두려워 해 뒷산 중턱에 호를 파서 산세를 끊고 장검으로 혈을 찔렀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단다.

 

이 전설을 들으니 약 20년전 ‘금강 1천리 물길’ 취재시 그곳 발원지인 전북 장수의 신무산 역시 임란때 이여송이가 직접 뜸을 떠 혈을 끊었다는 얘길 듣고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떠오른다.


백로담의 슬픈 사연을 듣고 물길을 바라보니 물길마저 통곡하는 양 역S자형을 그리며 온몸으로 꿈틀댄다. 그 꿈틀대는 물길을 따라 2km가량 더 내려가니 반원처럼 둥글게 물굽이 치는 왼편에 마을 하나가 뙤약볕에 그을리고 있다. 마을 형상도 노루 모가지 같고 물길도 노루목처럼 흐른다는 노루목 마을이다.

 

노루 모가지처럼 흐르는 달래강
괴산군 청천면 백로담에서 물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니 반원처럼 둥글게 물굽이 치는 왼편으로 손바닥만한 마을 하나가 뙤약볕에 그을리고 있다. 마을 형상도 노루 모가지 같고 물길도 노루목처럼 흐른다는 노루목 마을이다.


마을 반대편 도로에서 노루목의 깊은 인상을 담고 거봉리를 향하려는데 산모퉁이 초입에 조그만 다리(용추교)가 나타나고 그 안쪽으로는 골짜기가 이어진다.

 

이름하여 용추골로 향하는 곳이다.


용추골은 지난 봄 사전답사때 그 안쪽 사기막리에 있는 용추폭포와 연리목(사랑목)을 촬영키 위해 들어갔던 곳으로 여름 장마철 모습이 궁금해 다시  찾기로 하고 발길을 옮기니 봄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다.

 

바위를 다 갉아먹는  듯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적잖은 물이 2단으로 쏟아지는 광경이 정말 장관이다. 고즈넉한 산중에서 모처럼만에 폭포수 소리 들으며 한동안 정신없이 셔터를 누루고 나니 온몸에 냉기가 돈다.

 

삼복에 냉기를 받으며 절경에 빠지니 이 어찌 신선이 따로 있겠는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인근에 있는 연리목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폭포소리가 여전히 따라온다.

 

며칠 전 이곳과 지척거리인 선유동 계곡을 찾았다가 그곳 연리지(연리지는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맞붙은 나무를 일컫고 연리목은 두 나무 줄기가 하나로 합쳐져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을 지칭함)가 고사한 것을 직접 목격했던 터라 발걸음이 괜히 무겁다.

 

하지만 이내 모습을 드러낸 연리목은 봄에 본 건강한 모습 그대로 객을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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