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과 합류 후 한강 향해 ‘새 여정’ 시작
 3백리 물길 마치는 곳에 탄금대 우뚝
합수지점은 끝이 아닌 영원한 시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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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단월 강수욕장을 지난 달래강은 이내 달천교 밑을 흐른다.

 

달천교 부근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제법 큰 나루가 있던 곳이다. 동래~한양간 영남대로를 잇던 나루터 대신 들어선 것이 달래강(달천)의 대표적인 다리 달천교다.
 

영남대로 옛길은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 쪽에서 유주막거리~충렬사~단호사를 거쳐 이곳 달천 나루를 건넌 다음 주덕으로 이어지던 ‘큰 길’이다. 지금으로 치면 경부고속도로의 중간 길목인 셈이다.
 

현재 달천교는 두 개의 다리가 나란히 서있다. 둘 다 얼마 전 새로 놓인 2차선 다리로 서울·청주 쪽으로 가는 다리는 1990년에, 충주 시내쪽으로 들어가는 다리는 1999년에 각각 세워졌다. 예전 배가 다닐 땐 인근에 뱃사공들이 머물던 집들과 주막촌이 형성돼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질주하는 차량들 사이로 강물을 바라보니 물흐름이 무척이나 여유롭다. 강줄기의 끝자락인 남한강과의 합류점이 얼마 남지 않아 ‘달래강으로서의 생(生)’에 대한 미련에서일까. 아니면 3백리 물길을 잰 몸짓으로 달려온 피곤함 때문일까.
 

지난 여정이 거의 대부분 산골짜기를 지나는 계류였기에 이런 모습이 낯설다. 몇 배로 넓어진 강가로는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옆으론 시가지가 ‘도회지 빛’을 하고 있다.
 

천왕봉 기슭서 발원해 속리산 골짜기를 흘러내릴 때의 거친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갓 시집 온 새색시의 수줍은 발걸음을 하고 있다.
 

다만 그 맑디 맑던 물빛깔은 도처에서 받아들인 인간냄새 때문인지 거무칙칙하고 물내음마저 비릿하다. 안쓰럽다.
 

물소리도 마냥 조용하다. 3백리 본류와 숱한 지류를 지나면서 안고 온 사연과 전설들이 무척 많기에 제법 떠들썩할 법도 한 데 더없이 잔잔하다.   

 
‘달라진 물흐름’은 그렇게 조용히, 그리고 서둘지 않고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합수 직전의 달래강
달래강은 남한강과 합류하기 직전 지류인 요도천과 충주천을 받아들인 후 곧바로 탄금교 아래서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앞에 보이는 다리가 1977년 준공된 탄금교이다.

나그네의 발걸음도 미련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그간 정이 든 때문일까.

 

탄금대가 고구마처럼 떠있는 합류점으로 향하는 발길이 왠지 무겁다.


이제 탄금대다.

 

달래강 물길 답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머릿속에 되뇌 온 취재의 종착지가 아니던가.

 

속리산 천왕봉 발원지서 남한강 합수머리까지 물길 답사의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감회가 새롭다.
 

하지만 탄금대는 단순한 마침표가 아니다. 오히려 달래강이 탄생시킨 방점(傍點)이라고 해야 옳을 성 싶다.

 

달래강의 혼과 얼이 담긴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비록 동서 방향 길이가 1km 남짓하고 남북 방향의 너비가 600m 밖에 안 되는 데다 상대고도(해발고도 106m-최저고도 65m)가 40m밖에 되지 않는, 그야말로 ‘작은 봉우리’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깃든 혼과 얼로 인해 달래강 전 물길을 대표하는 명승지이자 역사·교육의 장으로 우뚝 솟아있지 않은가.

 

 

 

 

탄금대에 세워진 악성 우륵선생 추모비(위)와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 노래비(아래)

 

우선 탄금대(彈琴臺)는 그 명칭이 전해주 듯 가야국의 악성 우륵이 1400여년 전 가야금을 타며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우리나라 국악의 발상지다.

 

또 탄금대는 신립장군이 임진왜란때 천추의 한을 품고 장열하게 최후를 마친 전적지이며 일제강점기때 소설과 시로써 민족정기를 일깨운 독립유공자 권태응선생의 ‘감자꽃’ 노래비가 있는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탄금대는 곧 충주시민들의 정서적 고향이자 자랑이다. 그런 탄금대가, 그를 낳은 달래강이 이제 막 ‘달래강으로서의 생’을 마감하려는 곳에 위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니 필연이다. 그 필연은 특히 강 건너편, 즉 금가면 쪽에서 바라보면 더욱 실감한다.

 

그것은 바로 달래강이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게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비로소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분명 눈앞에 펼쳐진 합수 광경은 달래강이 남한강과 한 몸이 되어 새로운 본류인 한강을 향해 새 여정을 시작하는 출발점인 것이다.

 

 

남한강 건너편서 바라본 합수 장면
달래강은 충주 탄금대 부근서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그러나 남한강과의 합수가 끝이 아니다. 남한강과 한 몸이 된 물길은 또 다시 새로운 본류인 한강을 향해 새 여정을 시작한다. 왼쪽으로 보이는 나즈막한 구릉이 충주시민의 정서적 고향이자 자랑인 탄금대이고 오른쪽 다리가 탄금교이다.
 

새로운 출발, 새로운 물흐름을 시작하는 곳에 탄금대는 그렇게 필연으로 서 있다.

 

생각의 초점을 과거 소금배와 세곡선이 다니던 시절로 되돌려 본다.

 

남한강을 거슬러 온 당시 뱃사공들은 이곳 합수머리를 거쳐 달래강으로 올랐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곳이 바로 달래강 뱃길의 시작점임을 뜻하는 것 아닌가.

 

당시의 뱃길은 소금과 같은 해산물의 유입 통로 내지 세곡의 운반로였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외부의 소식이나 문화가 유입된 ‘소통의 길’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3백리 물길을 함께 해온 나그네는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달래강이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합수지점 탄금대는 끝이 아닌 영원한 시작점이란 것을….<계속>

 

팔봉 칼바위의 서글픈 사연 폭포수 되어 흐르고
‘달래강의 걸작’ 인간 탐욕으로 크게 훼손돼 
싯계 마을에도 개발 후유증 큰 상처로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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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불정(목도)에서 낙동강 수계의 안동 하회마을을 연상시키며 한바탕 요란하게 굽이친 달래강은 불정의 끝동네인 지문리에서 계곡 안으로 꼬리를 감췄다 다시 물머리를 일으켜 고개를 내미는데 그곳이 충주시 이류면 문주리 수주마을이다. 수주란 물가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목도에서 충주로 이어지는 한터고개를 통해 문주리 수주마을을 찾아들어가니 중부내륙고속도로 아래로 먼저 와 있는 물길이 햇빛에 반짝이며 다시 반긴다.

 

사흘전 내린 비로 물빛은 비록 탁하지만 도시 오염원에 찌든 물빛과는 전혀 다르다. 이곳 수주마을부터 팔봉, 싯계, 향산리로 이어지는 달래강 하류는 충주시민들의 젖줄로 이용되는 상수원 보호구역이다.

 

물가에 커다랗게 세워진 상수원보호구역 안내판이 마치 경고판처럼 무겁게 막아선다. 하지만 둑방길을 따라 조성된 수주마을 앞의 야생화도로가 인심좋은 수주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대신하는 양 온통 쑥부쟁이 꽃망울을 터트려 분위기를 바꾼다.

 

쑥부쟁이 화단 옆을 지나는 주민에게 물으니 “지금이야 수주 마을 옆으로 고속도로가 지나고 마을 진입로도 포장도로로 바뀌었지만 6.25전쟁 때만 해도 피난민들이 수없이 들이닥쳤던 두메 중의 두메산골이었다”고 ‘멀지 않은 옛날 이야기’를 들려준다.

 

 

허리 잘린 수주팔봉 칼바위
팔봉마을 앞의 칼바위 폭포는 농지개간을 위해 허리가 잘려져 나간 칼바위의 눈물이다. 본래 팔봉마을 앞의 팔봉은 ‘달래강이 빚은 최고의 걸작’이란 평을 들어왔지만 허리가 잘린 후 남겨진 상처로 인해 지금은 ‘어색한 경관’을 하고 있다.

수주마을을 지나면 마을 앞에 여덟 봉우리가 있다하여 붙여진 팔봉마을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수주와 팔봉 마을을 합쳐 흔히 수주팔봉으로 부른다. 수주팔봉은 문주리를 대표하는 두 중심 마을이다.

 

팔봉마을에 들어서니 왼쪽 마을 안으로 사액서원의 하나인 팔봉서원이 마을의 오랜 역사를 대변하고 서 있고, 마을앞 하천 건너에는 한 눈에도 어색한 폭포수 하나가 부자연스런 물소리를 내고 있다. 

 

이유가 궁금했다. 해서 연유를 알아본 즉 아니나 다를까.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인공폭포(칼바위 폭포)란다. 내력을 알고나니 금새 앙칼진 물소리로 들린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일제감점기때 강 건너 충주시 살미면 토계리 왕답마을 앞을 크게 우회해 달래강으로 흘러들던 석문동천 유역을 농지로 개간하기 위해 팔봉 산자락의 칼바위 중간을 끊은 후 1960년대까지 이모씨(작고)와 심모씨(〃) 등 여럿이서 이 사업에 매달렸으나 실패하고 결국 충주시에서 공사를 마무리해 약 7만평의 농지를 얻었다 한다. 한 마디로 물길을 틀어 논을 만든 것이다.

 

 

‘자연’과 바꾼 농지
충주시 살미면 토계리 왕답마을 앞의 농경지는 본래 달래강 지류인 석문동천의 최하류 유역이었으나 팔봉 산자락의 칼바위 중간을 끊어 물길을 튼 농지개간 사업이 있은 후 얻어진 ‘자연훼손의 결과물’이다.

기막힌 사연을 들어서인지 눈에 들어오는 주변 경관 모두가 서글퍼 보인다.

 

해발 500m도 채 안 되는 야트막한 연봉이지만 여덟 봉우리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장관은 가히 ‘달래강이 빚은 최고의 걸작’이란 평을 받아왔던 팔봉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젠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송곳바위, 중바위, 칼바위 등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봉우리들도 풀이 죽어 있다. 사연을 알지 못했을 때 지나치면서 느꼈던 위용도, 신비로움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 위대한 자연도 사람의 탐욕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일까. 허리가 잘려진 칼바위 아래로 연신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가 아예 비명소리로 들릴 지경이다.
 

15년 전 ‘금강 천리’ 물길 답사때 전북 진안의 상전면에서 보았던 육지 속의 섬 죽도가 생각나 아찔하다. 그곳 역시 농경지 개발이란 미명 아래 40m나 되는 바위절벽이 졸지에 잘려진 채 흉물로 남아 있다.

 

 

싯계에 선 ‘달래강 시인’
20여년 간 달래강에 얽힌 시를 써오고 있는 충주의 허의행 시인이 싯계 강변에 서서 ‘싯계’를 노래하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하류로 내려가니 싯계마을이다. 싯계마을은 또 어떤 곳인가. 주변경관이 수려하고 자연 생태가 잘 보존돼 있어 충북도와 충주시로부터 ‘충북의 자연환경명소’로 지정된 곳이다.


하지만 이곳도 심심하면(?) 터져나왔던 댐 건설 얘기와 최근 거론됐던 경부대운하 건설 계획안으로 주민들에게 심한 생채기를 안겨준 ‘비운의 땅’이다.

 

그 후유증이 얼마나 심한가는 현지 사진촬영 중인 취재팀을 보고 무조건 의심하며 꼬치꼬치 따져 묻던 주민들의 과민반응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달래강 시인’이라 자타가 인정하는 허의행시인을 싯계강변에서 만났다.

 

‘버들치 지느러미 물보라 치는 신 여울 새벽/ 마을은 목욕을 끝낸 아이처럼 신선하다/ 물비늘 고요히 빛나는 강위로/ 황홀한 드라이아이스 흰줄박이 두루미 한 마리/ 김연아처럼 물빛을 가르고 있다’


“그 무엇보다 때 묻지 않은 강이라 마음에 들기 때문에 1980년대 중반 이후 20년 넘도록 달래강 시를 쓰고 있다”는 허 시인의 싯계 예찬이다.

 

달래강의 새 명소 ‘단월 강수욕장’


싯계 다음으로 발길이 닿는 곳이 향산리다. 향산리 입구서 충주의 진산(鎭山)이라는 대림산이 동쪽으로 가물가물 시야에서 사라질 즈음 달래강은 소리없이 지류인 설운천을 받아들인 후 이내 유주막 물굽이를 돌아 충주 시내쪽을 향하니 그 첫 동네가 단월동이다.

 

단월동 초입에서 동행하던 허의행 시인이 갑자기 강 건너 서쪽 산자락을 가리킨다. 충주와 달래강이 낳은 조선 중기의 명장 임경업장군의 묘소가 있는 풍동(중풍) 뒷산이다. 묘소에서 바라보면 달래강이 훤히 보인단다. 과연 ‘충의와 문화의 고장 충주’다운 서기(瑞氣)가 느껴진다.
 

달래강은 단월동의 강수욕장을 지나면서 더욱 더 사람 냄새를 받아들인다.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놀이 공간으로서 옛 추억을 되살리는 하나의 명소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강수욕장을 찾은 어린 아이들의 개구리 같은 몸짓과 싱그러운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강물이 흘러가는 북쪽을 바라보니 탄금대가  손에 잡힐 듯 아른거린다. 이젠 달래강으로서의 물길도 얼마 남지 않았음이리라. 지나온 3백리 물길이 주마등 속 필름이 되어 마구 마구 돌아간다.

 

아, 달래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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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도~지문리 간 물굽이 ‘달래강의 하회마을’
잉어 뛰놀던 바위 옆엔 ‘잉어수 마을’ 자리  
김영수씨, “달래강 설화 배경지는 목도” 주장

 
목도(괴산군 불정면 소재지)를 지나는 달래강의 느낌이 전에 비해 다르다.

 

남한강과의 합류지점인 하류가 얼마 남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이곳 향토사학자 김영수씨(74)로부터 전해들은 소금배와 목도나루에 얽힌 이야기 때문이리라. 강폭은 훨씬 더 넓어보이고 물빛도 더욱 푸르러 보인다. 여울 역시 더욱 힘차게 몸짓하며 예전 뱃꾼들의 노랫소릴 금방이라도 토해낼 것 같이 재잘댄다.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이 물줄기를 타고 22자(尺)나 되는 소금배가 오르내렸다는 게 어디 가당하기나 한 얘기련만 김씨의 기억 속에선 여전히 살아있는 추억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으니 이를 두고 격세지감이라 하던가.


“제 나이 대여섯살 때입니다. 아버지가 콩자루를 어깨에 메주면 그걸 가지고 와서 소금과 바꿔가던 생각이 엊그제 같습니다. 예전엔 가호마을 강변(지금의 목도시장 옆)에 목도나루와 물물교환 장소가 있어 그곳서 곡식과 소금, 생선 등을 거래했지요.”

 

김씨의 아련한 추억을 뒤로 하고 목도(가호)를 지난 강물은 왼쪽으로 ‘달개들’을 거친다. 달개들은 목도와 음성천 건너 마을인 하산리 사이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말하는데 멀리 동쪽의 박달산에 해가 솟아오르면 가장 먼저 이곳 들판을 비추는 등 풍부한 일조량과 비옥한 토질로 각종 농산물이 생산되는 ‘달래강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다.


달개들 옆에서 음성천과 합류한 달래강은 다시 오른쪽으로 물머리를 틀어 감물면 이담(鯉潭) 마을을 향하는데 이담의 원 이름인 ‘잉어수’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내 들어선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마을자랑비가 내력을 소개하며 반기고 있다. 그 내용인 즉 본래는 잉어소였는데 잉어수로 바뀌었단다. 잉어수란 강 한가운데 서있는 잉어바위 아래로 항상 잉어떼가 모여들어 장관을 이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집성촌인 이 마을 안쪽에는 계담서원이 자리하고 있어 지금도 예와 시서풍류(詩書風流)를 숭상하는 이들의 수양처가 되고 있다.

 

 

계담서원

 

 

‘달래강의 화회마을’
 

괴산 목도지역의 가호리에서 달개들~잉어수~하문리~지문리로 이어지는 역S자형의 커다란 물굽이가 가히 ‘달래강의 하회마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기막히다. 사진은 인근 월출봉 정상에서 바라본 달래강 전경.

잉어수를 지난 강물은 또다시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감물면 하문리를 지나 지문리에서 계곡안으로 꼬리를 감추는데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해서 강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인근의 월출봉 정상을 올랐다.
 

월출봉은 괴산군 감물면 율리, 속칭 아시리 마을의 뒷산으로 얼마 전 산 중턱까지 벌목을 한 상태여서 한 길 넘게 자란 풀과 잔 나무들이 길을 가려 오르는데 무진 애를 먹어야 했다. 동행한 김영식씨(괴산향토사연구회)와 한 시간 가량 땀범벅을 한 후에야 비로소 정상에 도착했는데 정작 보여야할 강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속 타는 마음으로 이리저리 헤맨 끝에 벼랑에 매달린 커다란 소나무를 찾아 꼭대기에 올랐더니 금새 눈이 휘둥그레진다.

 

탁 트인 시야로 한눈에 들어오는 물굽이가 말 그대로 장관이다. 한 여름 뙤약볕에 땀 흘린 보람이 있다.
 

목도 가호리에서 달개들~잉어수~하문리~지문리로 이어지는 역S자형의 커다란 물굽이가 가히 ‘달래강의 하회마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기막히다. 김영식씨 또한 감탄사를 연발하며 달래강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냈다고 뿌듯해 한다.

 

 

경부대운하 노선이 계획됐던 배너미(舟越) 마을의 입구 전경.

‘한 건’ 했다는 마음에서인지 하산길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아시리에 들려 길안내를 해줬던 노인장에게 인사를 한 후 마을밖을 나서니 오른쪽으로 ‘주월리’란 안내판이 보인다. 얼핏 보아 ‘배(舟)’와 관련이 있는 마을 같아 김영식씨에게 물으니 “배가 넘어다니는 마을, 혹은 훗날 배가 넘어다닐 마을이란 뜻으로 ‘배너미’라 한 것이 한자로 주월리(舟越里)가 됐다”고 한다.

 

지명에 얽힌 선조들의 놀라운 선견지명을 이곳에서도 또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왜냐면 이 일대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경부대운하’ 노선이 계획되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달래강과 낙동강 수계를 잇는 최단거리가 바로 이곳 주월리 부근이란다. 실제로 지도를 보면 주월리 너머가 장연이요, 장연 너머가 바로 조령관문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 일대(하문리,주월리 일대)가 겉으로만 중단됐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진 가칭 달천댐의 제1 예정지란 점에서 대청댐 인근의 ‘무너미 고개’를 연상시킨다. 댐이 건설될 경우 넘나들 것이 ‘물’이 아닌 ‘배’란 것만 다를 뿐 상황은 똑같다. 섬뜩하다.

 

자연이 빚은 기막힌 절경과 선조들의 기막힌 선견지명을 동시에 확인한 아시리와 주월리를 뒤로 하고 찾아간 곳이 ‘괴산의 끝동네’ 지문리다.

 

예전에 한지(韓紙)를 만들었다는 이 마을은 마을앞의 조곡교를 사이에 두고 강 건너 동쪽으로는 괴산군 장연면 조곡리와 경계를, 하류인 북쪽으로는 충주시 이류면 문주리와 경계를 이루는데 하류쪽으로는 커다란 계곡이 막아서고 있어 더 이상 강줄기를 따라가긴 불가능하다.

 

 

조곡교에서 바라본 지문리 마을과 달래강. 계곡 뒷편이 수주 팔봉이다.


강가로 나 있다는 벼랑길을 포기하고 한터고개(목도~충주간)를 통해 문주리 수주 팔봉으로 들어가려고 되돌아 나오는데 동행한 김영수씨(향토사학자)가 돌연 중요한 의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달래강 이름을 낳은 ‘달래강 설화’의 배경지가 모두들 충주지역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괴산 관내의 목도지역 설화란 얘기다. 김씨는 “충주지역의 경우 예전엔 대부분 허허벌판이었기 때문에 설화에 나오는 ‘달래고개’ 등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이 많다”며 “따라서 강과 함께 고개,산길 등 설화에 나오는 여러 조건을 갖춘 목도지역이 달래강 설화의 배경지로 봐야하고 나아가 달래강 혹은 달천의 기점도 훨씬 상류쪽인 목도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달래나 ××’로 유명한 달래강 설화는 문헌설화가 아닌 구전설화란 점에서 그 배경지가 뚜렷하지 않고 또 전국적으로도 여러 형태의 달래강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으로 미뤄보아 김씨의 주장이 전혀 일리가 없지는 않은 듯하다. 또한 목도지역 하류로는 주민들도 괴강이 아닌 ‘달래강’ 혹은 ‘달천’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 것도 어느 정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달래강의 풍요로움
괴산 감물의 이담저수지 아래에 연출된 벼아트. 괴산군농업기술센터가 친환경농업을 선도하는 청정괴산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 유색벼를 이용해 연출한 농악(상모)놀이 장면. 벌판과 산자락이 만나는 곳에 달래강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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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과 더불어 조곡 운반하던 뱃길 역할
감물 유창리·불정 남창리 등에 漕倉 지명
목도까지는 노·삿대로 움직이는 배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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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이래로 강줄기는 그 자체가 인간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물류이동의 근간이 돼 왔다. 남한강을 포함한 한강 줄기 역시 한반도인들에겐 생명과도 같은 젖줄이었다.


선사시대 이후의 문화유적 다수가 한강과 남한강변을 따라 산재해 있고 뱃길, 즉 수운(水運)이 이뤄졌음을 알려주는 포구와 창고들이 아직도 곳곳에 흔적처럼 남아있음은 이를 입증해 준다.
 

수운은 단순히 강 하구의 해산물과 내륙의 농·임산물을 실어나르는 물류 이동 외에도 나라 살림의 근간이 되는 조세(세곡)를 운반(漕運)하는 중요 역할까지 담당해 왔다.


남한강과 그 지류인 달래강에도 오래전부터 조운이 이뤄졌음을 알려주는 조창(漕倉: 세곡을 보관하기 위해 강변에 설치한 창고)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초의 13조창 가운데 하나인 충주 덕흥창과 조선시대 조창인 연천 곶창(串倉), 앙엄 곶창이 그것이다.

 

고려 덕흥창은 지금의 충주시 가금면 강안의 여수포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연천 곶창은 충주의 서쪽 10리(가금면 창동리)에, 앙엄 곶창은 충주의 서쪽 60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들 조창을 통해서는 충주,단양,청풍,괴산,음성,연풍,제천 등지에서 걷힌 세곡이 수도의 경창(京倉)으로 옮겨졌다.
 

100년 전(일부 주민들에 의하면 1940년대까지)만 해도 소금배가 드나들었던 오간리 포구(괴산군 감물면 오간리)를 뒤로 하고 왼쪽으로 물굽이를 틀어 만나게 되는 곳이 유창리(有倉里)인데 지명에서도 풍기듯이 이 마을에도 조선시대 조창이 있었던 곳이다.

 

또 유창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불정면 남창리에도 조선시대 조창이 있어 인근지역서 거둬들인 세곡들을 달래강 뱃길을 통해 충주쪽 곶창으로 옮겼다가 다시 남한강 배편으로 경창으로 옮겼다.
 

지금으로부터 324년전인 1684년(숙종 7년) 발간된 규장각도서 괴산군 읍지 창고편에 보면 유창리 조창에는 쌀 93석 11말 4되 9홉 가량이 걷힌 것으로 기록돼 있다. 조창을 통해선 또 공물도 조달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충주·괴산 지역에서는 꿀,칠,대추,지초,여우가죽,수달피,삵가죽,족제비털 등이 바쳐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배편으로 서울까지는 얼마나 걸렸을까. 1930년 이영(李英)이 지은 ‘충주발전사’에 의하면 충주부터 하류까지는 결빙기나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매일 항행했는데 충주 탄금대(달래강과 남한강 합류점)로부터 서울 용산까지 약 315리를 여름철에 하행할 경우 약 12~15시간, 상행할 경우는 5~7일 가량 소요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강물이 많아 뱃길이 순조로울 경우이고 보통은 하행시간이 3일, 상행시간은 10일에서 2주일 가량 걸렸다고 한다.

 

배는 돛단배였으며 한 배의 적재량은 많게는 40석, 보통은 35~25석 가량이었다고 전한다.  

 

유창리에서 다시 하류로 내려가다 보면 강 건너 편에 ‘고려말 철안석불좌상(충북문화재자료 27호)’이 서있는 미륵댕이(지장리)란 곳으로 달래강 지류인 신항천이 흘러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도 예전에 소금배가 들렸다고 전하고 있다.

 

 

소금배 드나들던 미륵댕이
달래강으로 신항천이 흘러드는 미륵댕이에도 예전에 소금배가 들렸다고 전하고 있으나 지형이 크게 변해 있다.
 

이 미륵댕이를 조금 지나면 왼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커다란 바위가 나타난다. 이름하여 ‘구경바위’다.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면 인근경치가 구경할 만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경바위를 호기심에 올라서니 전해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니다.

 

동에서 북으로 굽이치며 흐르는 달래강 푸른 물결이 소나무 가지의 자유스런 몸짓과 어울어진 게 여간 멋진 게 아니다.

 

눈길을 돌려 수십길 아래를 바라보니 강물 위로 기다란 바위 면이  잠길 듯 말 듯 빼곰이 나와있다. 송장바위다. 얼핏 보니 진짜 물위에 떠 있는 송장처럼 보인다.

 

 

구경바위에서 바라본 달래강
괴산군 불정면 미륵댕이를 지나 목도쪽으로 가다보면 강변으로 깎아지른 듯한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는데 이름하여 ‘구경바위’다.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면 인근경치가 구경할 만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내는 구경바위에서 내려다본 ‘송장바위’
.

구경바위 건너 편으로는 또다시 오른쪽으로 절벽이 나타난다. 지금은 절벽 밑으로 유창리를 드나드는 도로가 개설돼 있어 옛 정취가 많이 사라졌지만 절벽 한 쪽에 ‘소금강’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을 정도로 예전엔 경치가 무척이나 빼어났던 곳이다.
 

북쪽을 향해 흐르는 달래강을 배경으로 ‘소금강’의 전경을 촬영하려 하는데 때마침 가을바람에 한층 높아진 하늘 위로 흰구름 한 무리가 산자락 끝에 매달려 재주를 부린다. 가히 절경이다.

 

 

괴산 목도 부근의 달래강
괴산 목도 인근의 구경바위 건너 편 절벽에는 ‘소금강’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을 정도로 예전엔 경치가 무척 빼어났던 곳이다. 북쪽을 향해 흐르는 달래강 물결과 먼 산 위로 피어 오른 흰구름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절경을 뒤로하고 이내 들어선 목도(괴산군 불정면 면소재지)에는 미리 약속한 향토사학자 김영수·김영식씨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차 한잔을 마시며 김영수씨로부터 “불정면 목도리는 예부터 ‘목나루’라고도 불렸는데 한자로는 기를 목(牧), 건널 도(渡)로 음성천과 달천강의 합수머리 들판서 말을 많이 길러 목나루라 한 것이 지금의 목도가 됐다”는 유래를 듣고는 예전에 목나루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목나루는 지금의 목도교 바로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김영수씨(74)에 의하면 남한강 줄기에는 두 개의 큰 나루가 있었는데 그 중 남한강 본류에 있는 충주 엄정면의 목계나루가 가장 컸고 그 다음으로 이곳 목도나루가 컸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목도가 불정면 소재지가 되면서 목도나루가 생겼고 1938년 인근에 제방이 쌓이면서 시장이 더욱 번창했으며 1959년 나루 바로 위쪽에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질 때까지 나루가 운영됐다고 한다.

 

 

예전의 목도나루를 설명하는 향토사학자 김영수(오른쪽)·김영식씨.

목도나루는 장호원-음성-목도-연풍-문경 혹은 장호원-음성-목도-입석-상주를 잇는 중요 길목으로서 주요 이용자인 음성군 소이면 일부와 괴산군 불정·감물면 전역, 장연면 일부지역 사람들이 여름에 보리 한 말, 가을에 벼 한 말씩 모두 380여 석을 모아 뱃삯으로 주었다고 한다.

 

목도나루의 나룻배는 낙찰제로 운영됐으며 대략 일년에 벼 160여 석에 낙찰됐다고 한다.

 

김씨는 또 남한강 뱃길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증언을 해줬다. 그에 의하면 남한강 본류까지는 커다란 황포돛단배가 다녔지만 지류인 달래강으로는 그보다 작은 배, 즉 노와 삿대로 움직이는 배가 다녔다는 것이다. 김씨는 그 배의 길이가 대략 22자 정도(6~7m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또 당시에는 배가 여울을 통과할 때 동원되는 장정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었으며 목도시장 안에는 주막도 많고 상점도 많아 ‘돈’이 많이 오갔기 때문에 주변에는 소위 어깨잡이들이 들끓었다고 증언했다.

1백년 전까지 소금배 다니던 ‘삶의 젖줄’
벽초, 괴강서 낚시하며 유년시절 꿈 키워
江口商船 시 통해 ‘소금배’ 존재 전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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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군 괴산읍 동쪽을 지나는 달래강은 괴산 사람들에겐 추억의 장소다.

 

괴강다리가 놓이기 전 ‘차배’라는 나룻배가 오가던 느티여울엔 여름이면 멱을 감고 뱃놀이 하는 사람들로 항시 북적였다.

 

“느티여울 맑은 물에 쏘가리가 살찌고/ 잘 익은 솔잎술을 손님에게 권하는 즐거움이여”라고 노래한 한시가 전하듯 괴강은 이곳 사람들의 가슴에 뚜렷이 각인된 고향의 모습, 어머니 모습 같은 존재다. 


괴강은 또 이곳 사람들의 삶의 젖줄이다. 100여 년 전만 해도 이곳 느티여울까지 소금배가 오가며 필수품인 소금 뿐만 아니라 비릿한 바다 산물이며 바깥 세상의 소식까지 덤으로 전해주었기에 괴강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닌 생명과 소통을 이어준 고마운 끈이었다.


이러한 중심에 늘 느티여울이 있어왔다. 괴강이란 이름 자체가 느티여울, 즉 괴탄(槐灘)에서 유래됐고 지금도 괴산 하면 떠오르는 것이  괴강이듯 그 이면엔 언제나 느티여울이 자리잡고 있다.

 

느티여울의 잔잔한 물결을 따라 좀 더 아래로 내려가면 또 다시 물머리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며 여울을 일으킬 즈음에서 괴산이 낳은 거목 중의 거목 한 사람의 체취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현대사의 수레바퀴에 맞물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벽초 홍명희다.


‘임꺽정’이란 역사소설로 널리 알려진 홍명희는 괴강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괴산읍 인산리 생가(부친 홍범식의 고가)에서 태어나 괴강에서 멱을 감고 낚시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전하는데 그가 낚시를 하며 꿈을 키우던 곳이 바로 고산구곡의 하나인 만송정 부근이다.

 

만송정이 있었다고 하는 곳은 괴산읍 제월리 바로 앞 강변으로 예전엔 커다란 소나무가 강물과 어울어져 멋진 절경을 이뤘다고 하나 지금은 노송(老松)이 강물에 떠내려가 옛 정취는 온 데 간 데 없고 최근 심어진 어린 소나무들이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제월대 전경
고산9경을 낳은 제월대 부근은 벽초 홍명희가 유년시절 낚시를 하며 꿈을 키웠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넓은 들판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제월대가 휘감아 도는 괴강과 어울어져 한폭의 그림으로 다가선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인근에 있는 제월대로 발길을 옮기니 소나무와 참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주차장 한편에 벽초 홍명희 문학비가 눈에 들어온다. 고대 그리스 건축물에서나 봄직한 돌기둥이 부동자세로 사열하듯 서있고 그 한 가운데에 신영복 선생의 필체가 새겨진 하얀 비문이 한낮 햇볕을 받아 서럽게 버티고 있다.

 

숲속 길로 이어진 제월대 정상엔 조선시대 유학자 유근(柳根)이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곳 경치에 반해 지었다는 고산정이 이끼를 뒤집어 쓴 채 고즈넉이 서있다. 팔작지붕을 떠받친 처마 안쪽에 명나라 사신이었던 주지번(朱之蕃)의 호산승집(湖山勝集) 편액과 웅화(熊花)란 선비가 썼다는 고산정사기(孤山亭舍記) 편액이 ‘세월’처럼 걸려 있는 게 무척이나 고아하다.
 

 

고산정은 황니판, 관어대, 은병암, 제월대, 창벽, 영객령, 영화담, 고산정사 등과 함께 고산9경을 이루지만 그 자체가 괴산8경으로 꼽힐 만큼 주변 경치가 일품이다. 고산정에 올라 사방을 내다보니 멀리는 속리산서 발원한 달래강(괴강)이 푸른 몸짓으로 정자 밑을 휘돌아 흐르고 남으로는 작은 봉우리들이 마치 말을 타고 백두대간을 내달리듯 한없이 굽어보인다.

 

 

고산정

넓은 들판 한 가운데에 홀홀히 선 제월대를 휘감았다 빠져나온 강물은 이내 배나무여울(이탄)을 지나 괴산읍 능촌리의 취묵당 앞에 다다른다.

 

취묵당(충북도 문화재자료 61호)은 1662년 시인인 백곡 김득신이 세운 역시 팔각지붕의 독서제로 조선시대 정자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취하여도 입을 다무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취묵당은 김득신이 36년간 사기(史記) 백이전을 무려 1억1만3000번 읽은 것을 비롯해 웬만한 글과 책을 1만번 이상 읽었다는 곳으로 유명하다. 취묵당의 이명인 억만재(億萬齋)는 글자 그대로 김득신이 글을 읽을 때 1만 번이 넘지 않으면 멈추지 않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취묵당 안에는 중건기와 각종 시문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김득신이 썼다는 ‘醉默堂’과 후손 김교헌이 썼다는 ‘億萬齋’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다만 전면 기둥엔 시 ‘용호(龍湖)’를 양각한 주련이 있는데 이 역시 세번째 싯구의 주련이 없어져 임시로 종이로 써붙인 게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주련에 쓰인 용호란 시의 내용이다. ‘古木寒雲裏(고목은 찬 구름 속에 잠기고)/秋山白雨邊(가을 산엔 소낙비 들이치네)/暮江風浪起(날 저문 강에 풍랑이 일자)/漁子急回船(어부는 급히 뱃머리를 돌리네)’


이곳 취묵당에는 또 예전에 괴강을 통해 소금배가 다녔음을 알 수 있는 ‘강구상선(江口商船)’이란 귀중한 한시가 걸려있다. 글을 통해 ‘달래강(혹은 괴강) 소금배’의 존재를 기록한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번역한 내용을 보자.


‘우리집은 강가에 있으니/ 닻내리는 곳에는 백사장이 달빛에 밝다/ 바람은 한강어구에서 불어오고/ 내일은 생선과 소금파는 날이다/ 문밖에 장사배가 매여있고/ 멈춘 돛대는 산그늘 연기속에 있다/ 뱃가에서 돛대와 뱃머리를 요란스레 두드리니/ 마을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취묵당서 바라본 괴강(위)과 망화정서 바라본 괴강(아래)

짭짤한 새우젓내가 투박한 뱃사람들의 말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풍겨나올 듯한 생생한 정경을 시를 통해 가슴에 담고 다시 강변을 찾아 나오는데 산모퉁이 건너편으로 사당 하나가 그림처럼 다가온다.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과 문숙공(文肅公) 김제갑(金悌甲)의 위패를 봉안한 충민사다.


잠시 들려 마음속으로나마 두 공(公)의 혼을 기린 후 찾아들어 간 곳이 감물면 오간리다. 오간리란 마을 이름이 어색하게 다가와 마을 자랑비를 훑어보니 여러모로 생활조건이 좋아 ‘오가리’라 불렀던 것이 어느샌가 오간리로 변했단다.

 

오간리 강변엔 1백년 전까지 포구가 있어 이곳으로 올라온 소금배가 거래를 마친 후 인근서 생산된 쌀과 콩 등 곡물을 싣고 서울쪽으로 떠났다고 하나 지금은 수심도 얕아지고 포구 흔적도 사라져 말 그대로 상전벽해다. 다만 마을 안쪽에 있는 아흔아홉칸 집의 장손 이창훈씨(81)로부터 “집을 지을 때 목재를 배로 실어날랐다”는 증언만이 ‘잊혀진 뱃길’의 존재를 알려줄 뿐이었다.
 

 

이씨가 중건했다는 강변의 망화정에 들러 난간 사이로 비쳐진 괴강을 바라보니 조금전 취묵당서 느꼈던 강구상선(江口商船)의 ‘소금배 풍경’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오간리 포구
괴산군 감물면 오간리 강변엔 1백년 전까지 소금배가 들나들던 포구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수심도 얕아지고 포구 흔적도 사라져 말 그대로 상전벽해다. 원내는 ‘잊힌 뱃길’의 존재를 증언해 준 이창훈씨.

골골이 새겨진 名詩 다양한 서체로 전해져
괴산호 중류에 이어진 갈은구곡 ‘仙境’
애한정엔 학동들 글읽는 소리 들리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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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호(칠성호) 유역은 한 마디로 구곡(九曲)의 연속이다. 그만큼 예전엔 주변 경관이 빼어났다는 증거다.

 

지금은 비록 물에 잠겨 ‘잊힌 절경’이 되었지만, 바위 위에 새겨진 명문(銘文)으로 그 존재를 추정할 수 있는 거차비구곡과 운하구곡이 상류 쪽에 있고 그 아래로는 최근 그 실체가 밝혀진 연하구곡이 늘어서 있다.

 

또 괴산호 중류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갈론계곡에는 역시 최근에 실체가 밝혀진 갈은구곡이 ‘괴산호의 제2장’처럼 펼쳐져 있으니 이 어찌 구곡의 연속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갈론마을 위쪽에 있는 갈은구곡은 제1곡 갈은동문(葛隱洞門)을 시작으로 2곡 갈천정(葛天亭), 3곡 강선대(降仙臺), 4곡 옥류벽(玉溜壁), 5곡 금병(錦屛), 6곡 구암(龜岩), 7곡 고송유수재(古松流水齋), 8곡 칠학동천(七鶴洞天), 9곡 선국암(仙局암)에 이르는 일련의 절경들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 곳 역시 각 곡마다 바위에 새겨진 한시가 전하니 이것이 곧 갈은구곡시(葛隱九曲詩)다.

 

 

갈은동 3곡 ‘강선대’

갈은구곡을 최초 설정하고 시를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으나 구곡 내 바위에 전덕호(全德浩), 홍승목(洪承穆-홍명희의 할아버지), 이원긍(李源兢)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9곡에는 사노동경(四老同庚)이란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앞의 세 사람 중 한 사람이거나 그와 친한 동갑내기 네 명이 관련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갈은구곡과 갈은구곡시의 특이한 점은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9곡 선국암에 실제로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는 것과 각 곡마다 새겨진 한시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수의 외형적 형상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표현했으며 새겨진 서체 또한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향토사학자 이상주씨(괴산향토사연구회·극동대 외래교수)는 “갈은구곡을 설정하고 시를 지으며 어울렸던 사람들은 노장사상과 신선사상, 선인일치(仙人一致) 사상 뿐만 아니라 주자학적 학문도 겸비하고 다양한 서체까지 섭렵한 고고한 시인묵객들”이라며 “따라서 갈은구곡은 이들이 이룩한 중요한 문화유산이자 한시 학습의 야외강의실이요, 서체 연구의 자연학습장”이라고 평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옥녀봉 아래의 9곡 선국암에 새겨져 있는 한시를 보자.

 

‘玉女峰頭日欲斜(옥녀봉 산마루에 해는 저물어가건만)/ 我棋未了各歸家(바둑은 아직 끝내지 못해 각자 집으로 돌아갔네)/ 明朝有意重來見(다음날 아침 생각나서 다시금 찾아와 보니)/ 黑白都爲石上花(바둑알 알알이 꽃되어 돌위에 피었네)’(이상주 역)

 

기막힌 표현 아닌가. 전날 놓아두었던 바둑알이 모두 꽃으로 변해 돌위에 피어있단다.

 

선국암의 마지막 싯귀에 감명을 받아서인지, 한참을 앉았다 돌아서는 발길이 잘 떨어지질 않는다.

 

몇 번을 뒤돌아 보며 가까스로 빠져나온 계곡 입구에 또다시 괴산호의 푸른 물결이 햇빛에 반짝인다.
 

선경(仙境)을 지나 이곳에서 달래강 본류와 합쳐진 계곡물이 곧바로 푸른빛을 띤다. 그 맑디 맑던 유리알 물빛이 괴산호를 만나면서 금새 푸르게 변하는 것을 보니 변화무쌍한 물의 인생이 느껴진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융화할 줄 아는 물의 섭리리라. 먼 옛날 갈은구곡을 찾아 감흥을 노래하던 시인묵객들도 두 물이 스스로 합쳐지는 것을 보고 이러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괴산호는 물흐름이 빠르다. 다른 호수 같으면 몇날 며칠이고 머물렀다 흐르련만 괴산호의 물은 성급히 흐른다. 댐이 세워질 때부터 발전 전용댐으로 지어진 데다 규모 또한 매우 작게 설계됐기 때문이다.
 

 

20~30km 떨어진 상류 쪽 물이 댐 수위에 미치는 영향이 불과 한 나절이면 나타나 곧바로 수문 조작에 들어가야 한단다. 홍수조절 기능이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다.

 

 

괴산댐 방류
발전 전용댐인 괴산댐은 홍수조절 기능이 거의 없어 상류 쪽에 웬만한 비가 오면 수문을 열고 방류한다.

괴산호의 물이 댐을 벗어나려면 두 개의 수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하나는 발전용 취수구를 통과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댐위에 세워진 7개의 수문을 통해 낙하하는 길이다. 평상시 대부분의 물은 발전용 취수구를 통해 흘려보내지지만 홍수때에는 댐 위의 수문을 통해 방류된다.

 

수문을 여는 갯수는 댐 상류 쪽의 유입량에 따라 달라지는데 올해 7개의 수문을 모두 연 것은 지난 7월 25일 단 한 번 뿐이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댐 수문을 통해 흘려보낸 최대 유하량은 지난 1980년 대홍수시 기록한 초당 5300톤이다. 당시 댐 위 오른쪽 공도교(댐을 공용도로로 사용토록 설계한 다리)를 3.15m나 월류했다고 하니 가히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내렸는지 짐작이 간다. 이 때 댐 주변건물이 완전 유실되고 본관과 주기기가 침수피해를 입어 1999년부터 6년간 대대적인 복구공사를 한 바 있다.

 

댐을 벗어난 달래강물은 또다시 ‘괴강’이란 이명으로 불려지면서 외사교를 지나 두천리서 지류인 쌍천과 합류하는데 합류장면이 매우 특이하다.

 

즉, 하나의 큰 제방 안으로 두 물이 흘러들되 곧바로 합류하는 게 아니라 1km 가량을 근접해 나란히 흐르다가 두천2리 앞에서야 드디어 하나의 물이 되는 것이다. 두천리란 이름은 ‘두 물’이 나란히 흐르다 만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되는데 한자로는 생뚱맞게도 ‘杜川’이다. 

 

 

‘두 물’로 흐르는 괴강

괴산댐을 지난 괴강은 몸을 추스리며 잠시 흐르다 지류인 쌍천과 만나는데 그 장면이 매우 특이하다.  즉, 하나의 제방 안으로 두 물이 흘러들어 곧바로 합류하는 게 아니라 1km 가량을 근접해 흐르다가 두천2리 앞에서야 드디어 하나의 물이 된다. 위로 보이는 ‘맑은 물’이 쌍천이다.

두천리를 지나면 이내 왼쪽으로 거대한 절벽 밑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이 괴산의 명소이자 매운탕집과 횟집들이 밀집한 괴강다리와 느티여울(槐灘)이다.

 

느티여울 옆 검승리 정자말 언덕에는 지금도 학동들의 글읽는 소리가 들려올 듯한 옛 정자가 느티나무 숲에 고즈넉히 들어앉아 있는데 이 곳이 괴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린다는 애한정(愛閑亭)이다.


지방유형문화재 50호인 애한정은 조선 선조때 유현(儒賢) 박지겸 선생이 세상을 피해 지내던 곳으로 애한정(큰애한정) 앞에는 현재 동몽선습비가 세워져 있다. 동몽선습은 박지겸 선생의 할아버지인 박세무(朴世茂) 선생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용교과서로서 박지겸 선생은 바로 이곳 애한정에 내려와 학문을 연구하며 때론 아이들을 불러모아 동몽선습을 가르침으로써 후학양성에도 힘썼던 것이다.

 

 

애한정 대문에서 바라본 괴강
애한정은 현재 두 채가 있는데 윗채가 조선 현종때 옮겨지은 큰애한정이고 아랫채가 본래의 원애한정이다. 원애한정 대문에서 괴강을 바라보니 괴산~연풍간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천지간에 별천지요 세상밖 그림이로다”

19세기 노성도선생이 설정 九曲歌 남겨
대부분 물에 잠기고 1·9곡만 남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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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 주변, 특히 산수풍광이 빼어난 중류 주변에는 유난히 ‘구곡(九曲)’이란 명칭이 많이 전한다.

 

위로부터 청원 미원의 옥화구곡과 괴산 청천의 화양구곡·선유구곡, 칠성의 쌍곡구곡·갈은구곡, 그리고 최근에 존재가 알려진 괴산댐 내(칠성) 연하구곡과 연풍의 풍계구곡 등이 그것이다.


이들 구곡에는 구곡시(九曲詩) 혹은 구곡가(九曲歌)(옥화구곡은 六歌가 전함)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과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주자학을 공부하던 옛 선비들이 경치가 뛰어난 이들 지역을 찾아 나름대로 구곡을 설정하고 그에 걸맞은 시와 노래를 읊으며 그들만의 이상향을 동경한 데서 유래됐다.

 

지난 1957년 2월 괴산댐이 준공되면서 물에 잠긴 연하구곡(煙霞九曲)은 그로부터 44년 뒤인 2001년 괴산지역 향토사학자인 이상주씨(괴산향토사연구회·청주대 강사)가 한문학보 제4집에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씨에 의하면 연하구곡은 조선 후기 경은(敬隱) 노성도(盧性度, 1819~1893)란 선비가 설정하고 각 곡(曲)마다 정경을 읊은 연하구곡가를 남겨놓은 곳으로, 괴산군 청천면 운교리 경계로부터 칠성면 사은리 산맥이 마을에 이르는 달래강변에 위치해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물에 잠겨 있고 극히 일부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채 ‘전설속 절경’이 돼가고 있다.


연하구곡을 최초로 설정한 노성도 선생은 원래는 경북 상주에 살았으나 그의 10대 선조인 소제(蘇齊) 노수신 선생의 적소(謫所·유배생활을 하던 곳)를 관리하기 위해 이곳 연하동(현재 산맥이 마을에는 노수신 선생의 적소가 남아 있음·사진 참조)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산수의 아름다움에 감탄해 연하구곡(연하동)을 설정하고 많은 글과 시를 남겼는데 당시의 느낌을 적은 글에 연하구곡의 설정 배경을 읽을 수 있다.


‘불그레한 구름이 창가에 비치고 구곡에 아침햇살 비치니 이곳은 세상에서 뛰어난 산수다. (중략) 노니는 사람은 바람과 안개를 좋아하면서 시를 읊조리고 신선은 구름과 노을에 살면서 즐기는 것을 좋아하니 이곳 연하동은 가히 신선이 별장으로 삼을 곳이다.“(이상주 역)

 

 

저 안에 연하구곡이…
연하구곡은 조선 후기 노성도란 선비가 설정하고 각 곡(曲)마다 정경을 읊은 연하구곡가를 남겨놓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물에 잠겨 있고 일부만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낸 채 ’전설속 절경‘이 돼가고 있다.
 
현재 연하구곡 가운데 상단부가 물위로 드러나 옛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곳은 제1곡인 탑바위(일명 족두리바위)와 9곡인 병풍바위(屛巖) 뿐이다.

 

제1곡 탑바위(塔巖)는 댐 상류쪽 운교리 경계지점(운교리 아래 아가봉쪽 산자락)에 있고 제9곡 병풍바위는 댐 하류 왼쪽 절벽(산맥이 아래 천장봉쪽 절벽, 현 과수원 맞은 편)에 위치해 있다.

 

물속에 잠긴 나머지 절경 즉, 2곡 뇌정암(雷霆巖, 벼락바위) 3곡 형제바위(삼형제바위, 쌀개바위) 4곡 전탄(箭灘) 5곡 사기암(詞起巖) 6곡 무담(武潭, 무당소) 7곡 구암(龜巖, 거북바위) 8곡 사담(沙潭)은 1곡과 9곡 사이에 연이어 있었다고 한다.

 

연하구곡의 특징은 이렇듯 상류로부터 하류로 내려가면서 구곡이 설정돼 있다는 점이다. 다른 대부분의 구곡들은 하류에 ’동문(洞門·입구)‘과 함께 제1곡을 설정하고 이어 상류쪽으로 가면서 차례로 이름을 붙인 반면 연하구곡은 그 반대다.
 

이에 대해 이상주씨는 ”당시 노씨 문중인 광산 노씨 세거지가 경북 상주 쪽에 있었기 때문에 상류지역을 거쳐 자주 왕래하다 보니 그쪽 방향에 익숙해져 1곡을 상류쪽에 설정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고 풀이하고 있다.

 

연하구곡의 ’남아있는 정취‘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배를 타고 찾아간 제1곡 탑바위는 아직도 거대한 바위들이 층층이 탑을 쌓은 듯 푸른 물빛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서있다. 맨 윗단의 바위는 마치 신부의 족두리 모양을 하고 있어 바로 윗 동네인 운교리 주민들은 현재 ’족두리바위‘로 부르고 있다.
 

이 탑바위 바로 옆 강변에는 예전에 마당바위라는 넓은 바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물에 잠겨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또한 탑바위 주변에는 선유대(仙遊臺), 강선암(降仙岩)과 같은 글귀 외에도 많은 한시가 암각돼 있다고 하나 장마철 불어난 수위로 직접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움을 더했다.

 

그 중 탑바위 아래쪽 경사진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한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우뚝하게 하나의 바위 강가에 솟아있는데/ 꼭꼭 감싸 매우 조화로우니 조화옹(造化翁·조물주)의 솜씨일세/ 이름은 탑바위라 했는데 비둘기가 또한 즐기네‘(이상주 역)

 

 

연하1곡 ’탑바위‘

거대한 바위들이 층층이 탑을 쌓은 듯 푸른 물빛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탑바위. 맨 윗단의 바위가 신부의 족두리 모양을 하고 있어 인근 주민들은 ’족두리바위‘로 부르고 있다.


9곡 역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어 배를 타고 찾아가야만 했다. 괴산호를 가로질러 건너편 산인 천장봉 끝자락에 다다르니 밑둥을 수십길 물속에 담그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9곡인 병풍바위다.

 

이곳에도 많은 글귀와 한시가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고 하나 2줄의 종서로 써진 ’연하수석(烟霞水石) 정일건곤(精一乾坤)‘ 중 맨 윗자인 연(烟)과 정(精)자의 상단부만이 물위에 빼곰히 내밀고 있다. 풀이를 하자면 ’연하동의 제일가는 수석이요, 천지간에 유정유일(惟情惟一)이로다‘란 뜻이니 별천지가 따로 없단다.
 

이 글귀 옆에는 ’숭정사을축(崇禎四乙丑) 동치 사년 을축 이월 일(同治 四年 乙丑 二月 日)‘이라 새겨져 있다 하나 확인하지 못했다. 동치 사년 을축은 서기 1865년으로 노성도 선생은 바로 그해 이곳에 와 시를 짓고 글씨를 새겼던 것이다. 역시 물에 잠겨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이곳에는 ’연하동문(烟霞洞門)‘이란 글귀와 함께 9곡에 대해 읊은 연하구곡운(烟霞九曲韻)을 암벽에 새겨놓았다고 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깎아세운 병풍바위는 별천지니 천장봉 아래서 기꺼이 즐기노라/ 산은 높고 물은 푸르러서 진경을 이루니/ 이곳 연하동이말로 세상밖 그림일세‘

 

 

 연하9곡 ’병풍바위‘
연하9곡인 병풍바위에도 많은 글귀와 한시가 새겨져 있다고 하나 2줄의 종서로 써진 ’연하수석(烟霞水石) 정일건곤(精一乾坤)‘ 중 맨 윗자인 연(烟)과 정(精)자의 상단부만이 물위에 빼곰히 내밀고 있다. 원안이 물밖으로 보이는 연(烟)자와 정(精)자.
 

 

노수신 선생의 적소
연하구곡을 최초 설정한 노성도선생은 원래는 경북 상주에 살았으나 그의 10대 선조인 소제(蘇齊) 노수신선생의 적소(謫所·유배생활을 하던 곳)를 관리하기 위해 괴산 칠성의 산맥이(연하동)로 들어왔다고 한다. 노수신 적소는 현재 충북도 기념물 74호로 지정돼 있으며 수월정(水月亭)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괴산댐에 묻힌 옛절경 반세기 만에 모습 드러내
‘雲霞洞門(운하동문)’ 암각 문귀 최초 확인 개가
거치비 마을 유래된 우암 송시열 글씨 물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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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 물길 3백리 가운데 물흐름이 ‘노루 모가지’ 형국을 한 곳은 무척 많다.

 

하지만 마을 이름이나 지명으로서의 노루목으로 불리는 곳은 괴산군 청천면의 노루목과 충주시 살미면의 노루목 뿐이다. 이들 두 곳의 지형은 모두 물줄기가 노루목처럼 휘돌아 흐른다는 공통점 외에도 물살이 비교적 센 여울을 이루며 굽이친다는 점이다.


달래강의 윗 노루목, 즉 청천면 관내의 노루목을 빠른 물살로 줄행랑 치듯 휘돌아 나온 물길은 예전 ‘덕평 유원지’라 불리던 거봉리 앞 강변에서 잊혀졌던 옛추억을 되새기며 굽었던 허리를 곧게 편다. 이곳 덕평 유원지는 지난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철이면 청주 등 인근에서 물놀이를 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항시 북적였으나 지금은 화양구곡과 선유구곡, 청천 뒤뜰숲 등 숲과 그늘이 있는 곳으로 손님(?)을 빼앗겨 점차 퇴색해 가는 옛명소로 변해 버렸다.

 

거봉리에서 추억을 털고 일어선 물길은 다시 거봉교를 지나 덕평에서 지촌을 잇는 덕평1교를 향해 푸른 비단을 곱게 펼친다. 조금 전의 지루하던 곧은 물길과는 딴판이다. 거봉교서 덕평1교 방면으로 절벽을 끼고 굽이치는 달래강의 모습이 가히 절경이다.

 

거봉교 아래 절벽밑으로는 자라들이 햇볕을 쐬느라 자주 출몰하던 자라바위들이 빼곰히 머리를 들고 올라와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자연산 자라를 잡기 위한 싹쓸이식 남획이 성행하면서 지금은 예전처럼 많이 올라오질 않는다고 한다.

 

달래강의 여름
괴산군 청천면 거봉교 부근의 여름 풍경. 왼쪽 절벽아래로 ‘자라바위’들이 즐비하게 있으나 최근 남획으로 바위 위로 올라오는 자라 숫자가 크게 들어들었다.


거봉교와 덕평1교는 이 근처에서 가장 높게 세워진 신설교로서 높은 다릿발과 관련해 지금도 많은 얘기가 오가고 있다.

 

이들 다리가 건설될 당시인 2000년을 전후해 가칭 ‘달천댐’이 새로 들어선다느니, 기존 괴산댐을 확대 증설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나돈 이후 걸핏하면 댐 건설 얘기가 들리곤 했는데 그 때마다 호사가들은 높게 세워진 이들 다릿발을 증거물인 양 들먹이며 마치 사실처럼 말해오고 있는 것이다.
 

덕평1교가 세워진 양쪽 강변으로는 새마을운동이 물결치던 지난 1970년대 중반까지도 나룻배가 있어 덕평리와 지촌, 사기막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먼 이야기’가 됐다.


거봉교에서 덕평1교 사이의 구간은 매년 여름 장마철만 되면 하류쪽 괴산댐의 영향으로 수위가 올라가는 사실상의 댐 상류에 속한다. 따라서 이 구간부터 최소한 댐 직하부(괴산군 칠성면 외사·송동리)까지는 괴산댐 건설로 인해 나타난 각종 영향을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괴산댐 최상류 전경
괴산댐 최상류쪽인 덕평1교 부근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 지역에 머물면서 직접 썼다는 ‘거차비 동문(去此非 洞門)’이란 글귀가 암각돼 있다고 하나 지금은 물에 잠겨 확인할 길이 없다. 


괴산댐은 조선전업주식회사(한국전력공사의 전신)가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에 지난 1952년 착공, 5년만인 1957년 준공한 댐으로 비록 규모는 작지만  순수한 국내 기술진에 의해 조사,계획,설계,시공된 최초의 발전 전용댐이다.

 

지금은 괴산댐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지만 예전엔 수전댐, 칠성댐, 외사댐 등으로도 불렸으며 댐내 호수, 즉 괴산호는 괴산군 칠성면과 문광면, 청천면 등 3개 면에 걸쳐 있다.


댐의 유역면적은 671㎢, 총저수용량은 1500만톤으로 댐 치고는 많지 않은 양이다. 하지만 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역 안에는 최근 그 존재가 밝혀진 ‘연하구곡’ 등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던 옛 계곡들이 수많은 문화유적과 함께 물에 잠겨있으며 댐 조성에 따른 생태변화 등 자연환경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댐 건설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댐내 잊혔던 구곡들을 재조명하고 나아가 생태계에 나타난 각종 변화들을 되짚어보기 위해 수 차례에 걸쳐 댐유역을 현지 답사했다.


필자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댐 최상류쪽인 덕평1교 부근의 동쪽 절벽으로, 이곳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 지역에 머물면서 직접 썼다는 ‘거차비 동문(去此非 洞門)’이란 글귀가 암각돼 있다고 하는 곳이다.

 

필자가 다른 곳을 재켜두고 이곳을 먼저 찾은 이유는 인근에 있는 지촌리의 ‘거치비’ 마을 이름이 이 글귀의 ‘거차비’에서 유래됐을 만큼 상징성과 역사성이 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암 선생이 ‘가히 한번 가볼 만한 곳’이라고 바위에 글자까지 새겨가며 감탄했던 이 지역의 대표적인 옛명소였기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현지 어부의 도움으로 배까지 빌려타고 찾아간 취재팀은 이 일대를 이 잡듯 뒤지며 암각된 글자를 찾아 헤맸으나 끝내 확인하지 못한 채 현지 주민인 박래성씨(81)로부터 “물속에 잠겨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만 듣고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더욱이 아쉬움을 더한 것은 ‘동문(洞門-물가의 절경 혹은 경승지의 입구란 의미로서 특히 구곡과 같은 연이은 절경의 첫 번째 절경에 흔히 붙임)’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는 증언으로 보아 예전엔 이 일대를 중심으로 빼어난 절경이 강을 따라 줄줄이 이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이렇다할 절경이 남아있지 않아 상전벽해의 무상함을 다시금 느껴야만 했다는 점이다.

 

달래강의 겨울풍경과 운하동문 글귀

괴산댐 최상류 운교리 부근의 겨울풍경이 색다른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원내는 취재팀이 최초로 찾아낸 ‘운하동문’ 암각글자로 사진의 물굽이 친 절벽 부근 바위에 새겨져 있다. 

 

운하구곡의 사모바위
바위절벽 위에 생뚱맞게 올려진 바위 모습이 전통혼례때 신랑이 쓰는 사모와 비슷하다해서 사모바위라 이름 붙여졌다고 하나 얼마 전 외지인들이 올라가 사모를 훼손하는 바람에 ‘어색한 사모바위’가 돼 버렸다. 원내가 훼손된 사모 부위.

 

‘거차비 동문’의 존재를 증언해 준 박래성씨


이러한 아쉬움은 두 번째로 찾아간 운교리앞 절벽에서도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다만 이곳 절벽에서는 배를 빌려준 여영희씨(현지어부·운강식당 운영)의 도움으로  ‘운하동문(雲霞洞門)’이라고 암각된 네 글자를 최초 확인하는 보람을 얻었지만, 이 일대 역시 댐 조성후 변해진 물길로 옛정취는 찾아볼 수 없고 현대적인 댐 풍경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운하동문 글귀가 암각된 산자락을 끼고 운교리앞을 벗어날 즈음 수십길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나타나는데 이곳이 그 옛날 운하구곡의 마지막 절경으로 추정되는 사모바위다. 바위절벽 위에 마치 눈사람의 머리처럼 생뚱맞게 올려진 바위 모습이 전통혼례때 신랑이 쓰는 사모와 비슷하다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하나 얼마 전 외지인들이 올라가 사모를 훼손하는 바람에 ‘어색한 사모바위’가 돼 버렸다.

 

거봉교 아래의 겨울 풍경(왼쪽)과 여름 풍경 비교

백로담의 슬픈 사연에 물길마저 통곡하듯 굽이치고ㆍㆍㆍ

용추골 내 용추폭포 하얀 물줄기 절경 이뤄
가무내 명칭 금송아지(金牛) 전설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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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경 이룬 용추폭포
용추골 안에 있는 용추폭포는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과 함께 지금도 바위 주변에 용발자국이 남아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바위 위에서 떨어진 옥수(玉水)가 2단으로 펼쳐지며 절경을 이룬다.  


장마전선이 물러가니 하늘빛도 산천빛도 다 새롭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무섭게 요동치던 강물도 2~3일 지나니 언제 그랬냐며 수줍은 몸짓이다.

 

막무가내로 쏟아지는 장대비에 잠시 날갯짓을 사리던 물잠자리도 더욱 말쑥해진 차림이고 비가 그치면서 훨씬 높아보이는 푸른 창공엔 황조롱이 새끼가 비행술을 익히느라 이리저리 어지럽다.


괴산군 청천면 신도원에서 도원을 비껴 현천다리(도원교)에 도착한 강물은 또 한번 ‘가무내’란 명칭으로 이름갈이를 한다. 가무내는 말 그대로 ‘검은 내(현천·玄川)’란 뜻인데 이 지역을 중심으로 강바닥에 검은 바위와 돌이 많이 깔려있고 도원교 바로 아래엔 수심 깊은 소가 있어 항상 강물이 검게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지만 이는 현대적인 해석일 뿐 그 어원은 다른 데 있다.


괴산 청천지역 향토사학자인 김사진씨(60ㆍ전 괴산군 의원)에 의하면 예전에 이곳 물가서 금송아지가 나온 이래 쇠 금(金)과 소 우(牛) 자를 써서 ‘금우내’로 부른 것이 차츰 감우내→가무내로 변했다가 한자 지명으로 바뀌면서 현천이 됐다는 것이다.


이 가무내란 이름은 현 도원교가 세워진 부근(화양2리)의 지명이기도 하지만 이곳을 중심으로 한 달래강의 또다른 이름으로도 불러진다. 

금송아지(金牛) 전설을 안고 흐르는 가무내의 봄풍경.


어쨋거나 유난히 검게 보이는 하천바닥을 급한 물살로 지나친 가무내(달래강)는 현천다리 바로 아래서 커다란 소를 이루며 까불까불 다시 한번 몸을 추스린 뒤 이내 화양1리 청소년수련원 뒤편으로 흘러 지류인 화양천과 몸을 섞는다.


화양천은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경북 도계(백두대간 마루금)서 발원해 송면에서 선유동쪽의 관평천과 만나 화양계곡을 거쳐 흘러드는 지류를 말하는데 비가 온 뒤끝이라 수량도 많고 물빛도 유리알 같은 게 본류인 가무내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달래강 지류는 추후 별도로 보도 예정)


화양천을 만나면서 더욱 힘이 솟구친 가무내는 그야말로 바위 투성이인 마당바위 구간을 통과하면서 온갖 번뇌 다 토해낼 것 같은 하얀 몸부림을 친다.

 

달래강 전 구간이 암반으로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하상에 돌과 바위가 많이 깔려있지만, 이 구간은 특히 커다랗고 시커먼 바위가 빼곡히 들어차 있어 색다른 경관을 이루는데 그 중에서도 백로담 직전의 마당바위 부근이 가장 빼어나다.


이 구간은 또 절경도 절경이지만 ‘달래강의 숨결’ 취재팀이 수 개월째 추적하고 있는 ‘수달’이 가장 많이 서식하고 있는 수역으로 오죽하면 어부들도 그물을 치길 꺼려하는 요주의(?) 지역이기도 하다.(수달의 서식현황을 비롯한 달래강의 생태도 추후 상세 보도 예정)


이날 역시 돌위에 나보란듯 흔적을 남긴 수달똥을 집어들고 버릇처럼 냄새를 맡으며 물길을 따라 내려 가다가 며칠전 만났던 이 동네 어부를 다시 만나 ‘심한 수달얘기’를 듣게 됐는데 그 어부 왈, “엊그제 그물을 쳤더니 그물을 채곡채곡 쌓아놓은 게 마치 사람이 걷어놓은 것처럼 해놓고 물고기는 한 마리도 남겨두질 않았다”며 억울해 미치겠다는 표정이다.

 

수달 서식지

 마당바위 부근에는 수많은 바위와 강물이 어우러져 달래강 특유의 경관을 빚고 있다. 특히 이 구간은 ‘극성스러울 만큼’ 수달이 많이 서식하는 곳으로 어부들마저 그물 치길 꺼리는 수달천국이다.   

내심 반가운-어부들이 들으면 몹시 서운해할- 얘기지만 애써 표정을 감추고 도착한 곳이 후영리 백로담이다. 얼핏 듣기로도 범상치 않은 지명이 또 한번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백로담은 마당바위를 지나 후영교 부근의 커다란 물굽이를 이루는 지역을 일컫는데 예전엔 이곳 절벽 노송에 백로 서식지가 있어 강의 푸른 못(담ㆍ潭)과 함께 멋진 조화를 이뤘다고 한다.


백로담과 관련된 전설을 들어보자.

 

옛날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부하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는데 산세가 수려한 데다 백로가 많이 찾아오고 동네마저 부촌인 지라 훗날 큰 인재가 날 것을 두려워 해 뒷산 중턱에 호를 파서 산세를 끊고 장검으로 혈을 찔렀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단다.

 

이 전설을 들으니 약 20년전 ‘금강 1천리 물길’ 취재시 그곳 발원지인 전북 장수의 신무산 역시 임란때 이여송이가 직접 뜸을 떠 혈을 끊었다는 얘길 듣고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떠오른다.


백로담의 슬픈 사연을 듣고 물길을 바라보니 물길마저 통곡하는 양 역S자형을 그리며 온몸으로 꿈틀댄다. 그 꿈틀대는 물길을 따라 2km가량 더 내려가니 반원처럼 둥글게 물굽이 치는 왼편에 마을 하나가 뙤약볕에 그을리고 있다. 마을 형상도 노루 모가지 같고 물길도 노루목처럼 흐른다는 노루목 마을이다.

 

노루 모가지처럼 흐르는 달래강
괴산군 청천면 백로담에서 물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니 반원처럼 둥글게 물굽이 치는 왼편으로 손바닥만한 마을 하나가 뙤약볕에 그을리고 있다. 마을 형상도 노루 모가지 같고 물길도 노루목처럼 흐른다는 노루목 마을이다.


마을 반대편 도로에서 노루목의 깊은 인상을 담고 거봉리를 향하려는데 산모퉁이 초입에 조그만 다리(용추교)가 나타나고 그 안쪽으로는 골짜기가 이어진다.

 

이름하여 용추골로 향하는 곳이다.


용추골은 지난 봄 사전답사때 그 안쪽 사기막리에 있는 용추폭포와 연리목(사랑목)을 촬영키 위해 들어갔던 곳으로 여름 장마철 모습이 궁금해 다시  찾기로 하고 발길을 옮기니 봄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다.

 

바위를 다 갉아먹는  듯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적잖은 물이 2단으로 쏟아지는 광경이 정말 장관이다. 고즈넉한 산중에서 모처럼만에 폭포수 소리 들으며 한동안 정신없이 셔터를 누루고 나니 온몸에 냉기가 돈다.

 

삼복에 냉기를 받으며 절경에 빠지니 이 어찌 신선이 따로 있겠는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인근에 있는 연리목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폭포소리가 여전히 따라온다.

 

며칠 전 이곳과 지척거리인 선유동 계곡을 찾았다가 그곳 연리지(연리지는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맞붙은 나무를 일컫고 연리목은 두 나무 줄기가 하나로 합쳐져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을 지칭함)가 고사한 것을 직접 목격했던 터라 발걸음이 괜히 무겁다.

 

하지만 이내 모습을 드러낸 연리목은 봄에 본 건강한 모습 그대로 객을 반긴다.

 

 강을 사이에 두고 무릉리와 도원리 나란히 위치
 
가뭄 끝 장마로 하천·농경지 일시에 해갈 
 청천 뒤뜰숲 피서지로 각광 지역의 랜드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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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화9경의 마지막 명소인 박대소에서 몸을 풀어헤친 강물이 갑자기 거센 몸부림을 친다. 하룻 밤새 몸집도 수십 배 늘고 물빛도 온통 황톳빛으로 변했다. 7호 태풍 ‘갈매기’가 몰고온 집중호우 때문이다.

 

지난 6월 중순 단 한 차례 비다운 비가 내렸을 뿐 예년에 없던 마른 장마로 겨울철부터 내내 바닥을 드러내던 달래강이 하늘의 조화(造化)로 금새 딴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이 자연의 힘이다.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어쩔 수 없던 긴 가뭄이 자연의 조화로 일시에 해결된 것이다. 해서 달래강 주변 사람들은 이제서야 맘을 놓게됐다.

 

‘큰물’이 지나가지 않아 다슬기와 물고기들이 씨 마를까 걱정하던 어부들도, 연일 타들어가던 농작물을 바라보며 “며칠새 해갈되지 않으면 알갱이가 영글지 않아 곡식 먹긴 다 글렀다”고 애간장 녹이던 농부들도, 숲속까지 메말라 올해도 버섯포자 생기긴 다글렀다고 지레 한숨짓던 송이버섯꾼들도 이젠 모두 두 다리 뻗고 잠자게 됐다. 아니 오히려 국지성 호우가 더 내린다는 예보에 장마 걱정까지 하게 됐으니 하룻밤새 인간의 마음까지 간사하게 만들어 놓았다.

 

소리까지 요란해진 강물을 따라 박대소 계곡을 나오니 청원군의 끝동네인 쇠바우와 마주친다. 이 마을 앞에 새로 건설된 삼인교 중간이 청원군과 괴산군의 경계다.

 

다리가 없던 시절 마을주민들은 불편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고 한다. 강 건너 괴산군쪽 마을인 삼인리 사람들이 청원군 지역에 있는 논밭으로 일을 하러 왔다가도 속리산쪽 하늘에 검은 구름만 비치기만 하면 부랴부랴 강을 건너야 했단다. 그렇지 않고 우물쭈물 일욕심을 더 냈다간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 발이 묶여 물이 줄 때까지 마냥 생고생을 했단다. 속리산 지역이 워낙 비가 많은 다우지역이라 이 쪽의 ‘동네 날씨’ 갖고는 상류쪽 강우량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번에 불어난 강물도 속리산 쪽의 영향이 크다는 주민들의 말을 듣고는 다리를 건너 괴산군 청천면 관내로 들어서니 왼쪽으로 한들보가 눈에 들어온다. 청천~용화간 도로가 지나는 강평교 다리 위에서 한들보를 바라보니 이제껏 봐온 다른 보와는 규모가 비교 안 될 만큼 커 보인다. 청천지역에서 가장 넓은 들판을 끼고 있어 한들보라고 했다는 데 그 유래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들보를 넘어선 강물은 또 다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 이름이 청천지역을 흐른다 해서 붙여진 ‘청천천’이다. 본래 청천면은 조금전 지나온 삼인교 중간 경계지점부터 시작되나 청천 사람들의 관습상 한들보 바로 아래부터를 청천천이라 부르고 그 위를 박대천이라 부르고 있다.

 

불어난 물에 한들보에서 떨어지는 강물이 장관을 이룬다. 넓이 100m가 넘는 보막이에서 동시에 떨어져 한바탕 굽이친 후 하얀 포말을 만들며 몸을 사리는 모습이 마치 수문을 닫았다 연 것처럼 일사분란한 게 아주 볼 만하다.

 

모처럼만의 ‘큰물’, 그리고 장관
 태풍 ‘갈매기’가 몰고온 집중호우로 물이 불자 한들보에서 떨어지는 강물이 장관을 이룬다. 넓이 100m가 넘는 보막이에서 동시에 떨어져 한바탕 굽이친 후 하얀 포말을 만들며 몸을 사리는 모습이 아주 볼 만하다.

한참 넋을 잃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데 지나가던 사람들도 합세해 연신 ‘폰카’를 눌러댄다. 모두들 근래 보기 드문 광경이란다.

 

한들보 아래 귀만리로 들어서는 다리는 벌써 물이 목까지 찬 채 물위에 떠 있다. 다릿발은 아예 물에 잠겨 보이질 않는다.

 

이 다리 바로 아래 오른쪽으로는 속리산 뒤쪽(경북 용화)에서 흘러내려오는 신월천이 합수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강폭은 더 넓어지고 강물도 훨씬 많아졌다.

 

귀만리 앞 다리를 지나 한들(강평들)을 거친 강물은 청천면 소재지 인근으로 흘러들어 환경지킴이 공원 뒤 잠수교서 방향을 동북방향으로 약간 틀어 청천 뒤뜰숲(후평숲)을 스치며 질주한다. 환경지킴이 공원은 이 지역 주민들이 용화지역의 온천개발을 저지한 기념으로 세운 곳으로 달래강 수질과 자연환경을 지키려는 염원과 의지를 담고 있다.

 

청천 뒤뜰숲은 속리산 법주사 입구의 야영장숲(오리숲내 소나무숲)과 청원 미원의 금관숲과 더불어 ‘달래강 3대숲’이라 부를 만큼 명성이 자자한 청천지역의 명소다. 강가 옆으로 펼쳐진 모랫벌 위로 수십~수백년 된 참나무와 소나무, 느티나무들이 마치 하천가에 펼쳐놓은 파라솔처럼 즐비하게 서있는 모습은 이 지역을 찾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대표적인 랜드마크다.

 

불과 10년전까지만 해도 여름 휴가철이면 멋진 경관과 자연숲이 선사하는 시원한 바람, 강수욕, 여울낚시 등을 즐기기 위해 하루평균 수백~수천명이 찾아왔으나 국가 금융위기 이후 찾아온 장기적인 경기 침체 여파로 지금은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다.

달래강과 청천 뒤뜰숲
 청천 뒤뜰숲은 속리산 법주사 입구의 야영장숲(오리숲내 소나무숲)과 청원 미원의 금관숲과 더불어 ‘달래강 3대숲’이라 부를 만큼 명성이 자자한 청천지역의 명소다.

청천 뒤뜰숲을 반바퀴 돌며 섬 아닌 섬을 만들어놓은 강물은 이내 방향을 다시 틀어 고성리 고연마을을 향해 줄달음 친다. 청천뒤뜰에서 고연마을까지는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닫지 않는 계곡형 하천으로서 바닥에는 커다란 바위가 수없이 깔려있어 쏘가리,뱀장어,대농갱이 같은 경제성 어종이 많이 서식하나 워낙 인적이 드물어 불법어로가 성행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찻길을 통해 고연마을로 접어드는데 천변에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누런 암소가 평화롭게 되새김을 하면서 낯선 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비가 갠 틈을 타 동네주민이 매놓은 것이다.

고향의 풍경
 청천 뒤뜰숲을 지나 계곡이 휘도는 고연마을로 접어드는데 천변에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누런 암소가 평화롭게 되새김을 하면서 낯선 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고연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물머리를 튼 강물은 고성리 성암 못미쳐 도로변에 커다란 자연보를 형성해 놓은 후 다시 방향을 틀어 도원리를 향한다. 도원리 건너편 신도원은 청안 부흥쪽에서 흘러내리는 압항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이 일대의 금평·신도원·도원(원도원)리 하천변에는 최근 팬션과 민박집이 크게 늘어 이 지역의 새로운 수입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압항천이 청천천(달래강)으로 흘러드는 신도원리(중리) 합류지점에는 인근 무릉리에서 내려오는 조그만 실개천도 함께 합쳐지는데 그 물빛 만큼이나 동네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강 건너는 도원(원도원)이요, 합수머리가 있는 곳은 신도원, 실개천이 흘러내려오는 곳은 무릉이다. 이들 이름을 합쳐보면 ‘무릉도원’ 아닌가.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도원경처럼 끝없이 너른 땅과 기름진 논밭, 풍요로운 마을과 뽕나무, 대나무밭은 비록 없더라도 청천천과 인근 산들이 어우러진 이곳 산천경계가 결코 그에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 지역 선인들의 혜안을 읽을 수 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무릉리 안쪽에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자연을 벗삼아 사는 한 남자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행방을 모른단다. 외지서 들어왔다는 그도 처음에는 이곳 지명을 듣고 나름대로의 ‘이상향’을 꿈꾸며 들어와 그렇게 살다 바람처럼 어디론가 또 다른 도원경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장마철 이색 낚시
 비가 내려 달래강에 큰물이 흘러가면 각 다리나 천변에는 상류로 이동하는 눈동자개,메기,뱀장어 등을 잡으려는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이색적인 광경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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