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천렵하고 내일은 산행가세/ 꽃달임 모레하고 강신으란 글피하리/ 그글피 변사회할 제 각지호과 하시소."
조선 숙종 때 가인 김유기란 사람이 남긴 시조다.
나름대로 뜻풀이 해보면 "오늘은 강가에 나가 천렵하고 내일은 사냥가세. 화전놀이는 모레하고 신령맞이 굿판은 글피하리. 그글피에 있을 활쏘기 모임에는 제각기 술과 과일을 가져오소"이다.
오늘부터 내일 모레 글피 그글피까지 연거푸 닷새를, 그것도 각기 다른 놀이를 하면서 즐기자는 뜻이니 이 시조를 남긴 김유기는 아마도 보통 한량은 넘었는가 보다.
여기서 한 가지 관심을 끄는 것은 5일 동안 연이어 행해질 각기 다른 놀이 가운데 첫 번째 놀이가 천렵이란 점이다.
사냥도 있고 화전놀이도 있고 신령맞이 굿판도 있고 활쏘기 대회도 있는데 왜 하필 천렵을 첫 번째 놀이로 들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천렵이 갖는 보편적 특성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즉, 어느 특정 계층의 놀이가 아닌, 어느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었던 여름철 집단 휴식문화의 전형이 바로 천렵이요, 이 천렵을 하지 않고는 다른 어떤 놀이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선호되고 성행했기 때문이리라.
천렵(川獵)은 말 그대로 '개울사냥'이다. 내 천(川) 자에 사냥 렵(獵) 자이니 그럴싸 한 글자풀이 아닌가.
개울사냥을 하려면 우선 무기와 탄약(?)부터 준비해야 한다.
여기서 무기란 물고기를 잡을 도구를 말하는 것이요, 탄약은 그것을 요리할 먹을거리와 장비를 뜻한다.
작살 얼기미 통발 족대 등 물고기 잡을 만한 것이면 모두 동원한 후 장독대로 가 어머니 몰래 고추장과 된장 한 사발을 챙겨 곧바로 냇가로 달려가면 준비 끝.
마실 거리와 그릇을 가지고 먼저 도착한 친구들과 한바탕 물고기 잡이가 끝나면 이내 천렵국 끓이기에 들어가는데, 이 때 역시 장난끼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
두 세명이 눈치로 조를 짜 이웃 집 밭으로 돌격, 고추와 파 등 양념거리와 참외 수박을 잔뜩 서리해 오니 이 아니 진수성찬 아닌가.
천렵국 떨어지면 다시 한번 족대질하면 그만이요 양념거리 바닥나면 시장(?) 한번 더 다녀오면 그만이다.
수고라고 해봐야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놀이요 온종일 웃음바다다.
이렇듯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해지는 줄 모르게 마냥 즐기던 것이 천렵이다.
물고기를 잡아봤자 천렵국 끓일 만큼만 잡으면 족했고 놀던 자리 어질러 봐야 고작 나무로 불 땐 자리와 푸성귀 조각 몇 개뿐이니 여럿이 잠깐 주우면 그만이었다.
말이 개울사냥이지 요즘처럼 투망이니 쵸크니 하는 그물을 동원하여 싹쓸이식으로 행하는 물고기 남획이 아니요 쓰레기도 수십년 수백년 썩지 않는 화학제품이 없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 놀이문화도 바뀌는 법인가.
천렵이란 말은 이제 사라진 고목처럼 아예 쓰여지지 않고 그 대신 '휴가'니 '행락'이니 하는 말이 유행하고 있고 놀이판도 영 딴판이다.
물가에서 물고기 대신 개를 때려잡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고 술판에 고성방가에다 앉으면 고스톱에 포커다.
놀던 자리도 깨끗이 치우는 게 아니라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니 휴가철만 끝나면 온 나라 삼천리 강산이 쓰레기장이다.
건전한 행락문화를 유도하는 팻말이 곳곳에 설치돼 있고 해마다 간이화장실과 쓰레기장을 증설해도 막무가내다.
갈수록 극에 달하는 게 행락질서요 휴가문화다.
올해도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행락인파가 점차 늘어나면서 강가와 계곡이 벌써부터 신음하고 있으니 말이다.
가는 곳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온갖 추태와 쓰레기 더미다.
인근 주민들은 별 득도 없으면서 쓰레기 치우느라 연일 뼈 빠지고, 숲속과 밭고랑 마다에는 어느 누가 실례를 한 건 지 온갖 파리 꼬인 똥무더기 뿐이다.
이대로 가다간 선진 문화국가는커녕 '더티 코리아' '어글리 코리아' 신세도 영영 면치 못하겠다는 생각이다.
국민소득은 2만달러를 돌파하느니 뭐하느니 떠들어 대면서 하는 짓거리들(?)은 변하지 않는다.
좀 과한 얘기 같지만 똥 천지인 밭고랑을 맨발로 걸어다닐 농부들을 생각해 보라.
뿌리는 농촌인데 몸둥아린 도회지물을 먹어서인지 모두가 생각 다르고 행동 다르다.
올 여름 겪어낼 농촌 생활을 생각하니 괜한 마음이 앞선다.
아, 오늘따라 예전의 탁족(濯足)하는 여유와 마음이 더욱 그리워진다.
천렵을 해도 도를 지켜가며 자연을 즐겼던 선조들의 멋진 삶을 마음속에서나마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