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어느 겨울날, 미 군정청의 엘윈 M. 미더라는 사람이 북한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미 농무성 소속의 식물학자로 한국에 파견된 건 식물채집,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 토종식물을 채취해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요즘 말하는 생물자원 스파이격이다.
정상 근처 백운대에 이른 그는 한 나무를 발견하곤 멈춰선다. 이름하여 털개회나무란 나무인데 얼핏 보면 서양의 라일락 같지만 그보다 상품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아는 그였기에 서둘러 종자를 채취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채취해간 12개 종자 중 7개를 발아시켜 새 품종을 만들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한국서 가져온 것이니 그와 연관된 명칭을 붙이고 싶어도 몰래 들여온 게 마음에 걸리고 다른 이름을 붙이자니 마땅한 게 없었다. 그러던 중 한국서 자신을 도와주던 여타자수의 성(姓)이 김씨란 걸 생각하고 '미스김 라일락'이란 이름을 짓게 된다. 일설에는 미더박사가 털개회나무란 한국명을 기억하지 못해 한국서 가장 흔한 김씨 성을 땄다고도 한다.
허나 어찌됐건 한국산 털개회나무는 미군정 시대에 졸지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스김이란 묘한 이름을 달고 역수입되기 시작해 지금은 아예 미국산으로 각인된 채 버젓이 우리의 화단에서 진한 '미제 화장품 냄새'를 풍기고 있다.
역시 미국에 비싼 로열티를 주고 역수입되고 있는 잉거비비추도 팔자가 기구하다. 이 꽃의 원종은 본래 한국 특산인 홍도비비추였는데 1980년대 미국 국립식물원 베리 잉거박사팀이 내한해 추위에 강한 식물종자를 찾는답시고 국내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각종 종자를 채취해갔는데 거기에 홍도비비추가 있었다. 잉거박사는 그후 자신의 이름을 딴 잉거비비추로 신품종 등록함으로써 한국산이란 걸 숨긴 채 세계 꽃시장에 유통시켰다.
또 원추리란 야생화도 한국서 미국으로 건너간 후 데이릴리(하루백합)로 개량돼 포기당 3백달러를 호가하는 등 한국산이 미국산으로 개량되거나 둔갑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미 농무성 야생식물 유전자원 데이터베이스에는 현재 1천종이 넘는 한국 고유 식물들이 채집돼 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들은 이제 곡식종자까지 눈독 들이고 있다.
미국서 최근 품종 개량을 위해 이용된 35 종의 콩 종자 가운데 무려 6종이 한국 토종콩이란 사실은 그들 욕심이 종전의 야생식물 수준을 넘어서 그 이상의 것을 넘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수 생물자원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가져다 마치 자기네 것인 양 이름 붙여 역수출하는 그들. 자국 이익이라면 상대국 형편쯤이야 발바닥 때만치도 여기지 않는 그들. 그 속내를 훤히 알기에 앞으로의 일이 걱정된다. 곡식 종자까지 손댄 마당에 토종한우 등 가축 종자까지 넘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를 둘러싼 작금의 상황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마저 든다. 한우를 유독 좋아하는 우리 국민성과 입맛을 역이용해 행여 유전자 장난을 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만일 그럴 경우 급기야 '미국산 한우'란 이상야릇한 소가 유입되는 끔찍한 사태가 벌어진다.
석유 한 방울 안 나 매번 개 끌려가듯 유가가 치솟는 나라에서 그나마 갖고 있던 생물자원은 이미 거의 다 빼내가져 그 주권을 지키고 싶어도 더이상 지킬 것도 변변찮은 나라. 세계는 이미 수십년전 발들여놓은 종자전쟁으로 엄청난 이익을 얻고 있는데 이제 겨우 그 전장터로 '소총' 들고 나선 나라. 국민건강주권과 검역주권은 한·미 FTA로 이미 다 포기했다고 어린 학생까지 나서 연일 울분터트리는 나라. 경작지와 생산량 급감으로 식량주권마저 불안정한 이 나라에 대체 남은 주권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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