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도~지문리 간 물굽이 ‘달래강의 하회마을’
잉어 뛰놀던 바위 옆엔 ‘잉어수 마을’ 자리  
김영수씨, “달래강 설화 배경지는 목도” 주장

 
목도(괴산군 불정면 소재지)를 지나는 달래강의 느낌이 전에 비해 다르다.

 

남한강과의 합류지점인 하류가 얼마 남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이곳 향토사학자 김영수씨(74)로부터 전해들은 소금배와 목도나루에 얽힌 이야기 때문이리라. 강폭은 훨씬 더 넓어보이고 물빛도 더욱 푸르러 보인다. 여울 역시 더욱 힘차게 몸짓하며 예전 뱃꾼들의 노랫소릴 금방이라도 토해낼 것 같이 재잘댄다.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이 물줄기를 타고 22자(尺)나 되는 소금배가 오르내렸다는 게 어디 가당하기나 한 얘기련만 김씨의 기억 속에선 여전히 살아있는 추억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으니 이를 두고 격세지감이라 하던가.


“제 나이 대여섯살 때입니다. 아버지가 콩자루를 어깨에 메주면 그걸 가지고 와서 소금과 바꿔가던 생각이 엊그제 같습니다. 예전엔 가호마을 강변(지금의 목도시장 옆)에 목도나루와 물물교환 장소가 있어 그곳서 곡식과 소금, 생선 등을 거래했지요.”

 

김씨의 아련한 추억을 뒤로 하고 목도(가호)를 지난 강물은 왼쪽으로 ‘달개들’을 거친다. 달개들은 목도와 음성천 건너 마을인 하산리 사이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말하는데 멀리 동쪽의 박달산에 해가 솟아오르면 가장 먼저 이곳 들판을 비추는 등 풍부한 일조량과 비옥한 토질로 각종 농산물이 생산되는 ‘달래강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다.


달개들 옆에서 음성천과 합류한 달래강은 다시 오른쪽으로 물머리를 틀어 감물면 이담(鯉潭) 마을을 향하는데 이담의 원 이름인 ‘잉어수’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내 들어선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마을자랑비가 내력을 소개하며 반기고 있다. 그 내용인 즉 본래는 잉어소였는데 잉어수로 바뀌었단다. 잉어수란 강 한가운데 서있는 잉어바위 아래로 항상 잉어떼가 모여들어 장관을 이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집성촌인 이 마을 안쪽에는 계담서원이 자리하고 있어 지금도 예와 시서풍류(詩書風流)를 숭상하는 이들의 수양처가 되고 있다.

 

 

계담서원

 

 

‘달래강의 화회마을’
 

괴산 목도지역의 가호리에서 달개들~잉어수~하문리~지문리로 이어지는 역S자형의 커다란 물굽이가 가히 ‘달래강의 하회마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기막히다. 사진은 인근 월출봉 정상에서 바라본 달래강 전경.

잉어수를 지난 강물은 또다시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감물면 하문리를 지나 지문리에서 계곡안으로 꼬리를 감추는데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해서 강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인근의 월출봉 정상을 올랐다.
 

월출봉은 괴산군 감물면 율리, 속칭 아시리 마을의 뒷산으로 얼마 전 산 중턱까지 벌목을 한 상태여서 한 길 넘게 자란 풀과 잔 나무들이 길을 가려 오르는데 무진 애를 먹어야 했다. 동행한 김영식씨(괴산향토사연구회)와 한 시간 가량 땀범벅을 한 후에야 비로소 정상에 도착했는데 정작 보여야할 강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속 타는 마음으로 이리저리 헤맨 끝에 벼랑에 매달린 커다란 소나무를 찾아 꼭대기에 올랐더니 금새 눈이 휘둥그레진다.

 

탁 트인 시야로 한눈에 들어오는 물굽이가 말 그대로 장관이다. 한 여름 뙤약볕에 땀 흘린 보람이 있다.
 

목도 가호리에서 달개들~잉어수~하문리~지문리로 이어지는 역S자형의 커다란 물굽이가 가히 ‘달래강의 하회마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기막히다. 김영식씨 또한 감탄사를 연발하며 달래강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냈다고 뿌듯해 한다.

 

 

경부대운하 노선이 계획됐던 배너미(舟越) 마을의 입구 전경.

‘한 건’ 했다는 마음에서인지 하산길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아시리에 들려 길안내를 해줬던 노인장에게 인사를 한 후 마을밖을 나서니 오른쪽으로 ‘주월리’란 안내판이 보인다. 얼핏 보아 ‘배(舟)’와 관련이 있는 마을 같아 김영식씨에게 물으니 “배가 넘어다니는 마을, 혹은 훗날 배가 넘어다닐 마을이란 뜻으로 ‘배너미’라 한 것이 한자로 주월리(舟越里)가 됐다”고 한다.

 

지명에 얽힌 선조들의 놀라운 선견지명을 이곳에서도 또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왜냐면 이 일대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경부대운하’ 노선이 계획되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달래강과 낙동강 수계를 잇는 최단거리가 바로 이곳 주월리 부근이란다. 실제로 지도를 보면 주월리 너머가 장연이요, 장연 너머가 바로 조령관문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 일대(하문리,주월리 일대)가 겉으로만 중단됐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진 가칭 달천댐의 제1 예정지란 점에서 대청댐 인근의 ‘무너미 고개’를 연상시킨다. 댐이 건설될 경우 넘나들 것이 ‘물’이 아닌 ‘배’란 것만 다를 뿐 상황은 똑같다. 섬뜩하다.

 

자연이 빚은 기막힌 절경과 선조들의 기막힌 선견지명을 동시에 확인한 아시리와 주월리를 뒤로 하고 찾아간 곳이 ‘괴산의 끝동네’ 지문리다.

 

예전에 한지(韓紙)를 만들었다는 이 마을은 마을앞의 조곡교를 사이에 두고 강 건너 동쪽으로는 괴산군 장연면 조곡리와 경계를, 하류인 북쪽으로는 충주시 이류면 문주리와 경계를 이루는데 하류쪽으로는 커다란 계곡이 막아서고 있어 더 이상 강줄기를 따라가긴 불가능하다.

 

 

조곡교에서 바라본 지문리 마을과 달래강. 계곡 뒷편이 수주 팔봉이다.


강가로 나 있다는 벼랑길을 포기하고 한터고개(목도~충주간)를 통해 문주리 수주 팔봉으로 들어가려고 되돌아 나오는데 동행한 김영수씨(향토사학자)가 돌연 중요한 의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달래강 이름을 낳은 ‘달래강 설화’의 배경지가 모두들 충주지역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괴산 관내의 목도지역 설화란 얘기다. 김씨는 “충주지역의 경우 예전엔 대부분 허허벌판이었기 때문에 설화에 나오는 ‘달래고개’ 등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이 많다”며 “따라서 강과 함께 고개,산길 등 설화에 나오는 여러 조건을 갖춘 목도지역이 달래강 설화의 배경지로 봐야하고 나아가 달래강 혹은 달천의 기점도 훨씬 상류쪽인 목도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달래나 ××’로 유명한 달래강 설화는 문헌설화가 아닌 구전설화란 점에서 그 배경지가 뚜렷하지 않고 또 전국적으로도 여러 형태의 달래강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으로 미뤄보아 김씨의 주장이 전혀 일리가 없지는 않은 듯하다. 또한 목도지역 하류로는 주민들도 괴강이 아닌 ‘달래강’ 혹은 ‘달천’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 것도 어느 정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달래강의 풍요로움
괴산 감물의 이담저수지 아래에 연출된 벼아트. 괴산군농업기술센터가 친환경농업을 선도하는 청정괴산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 유색벼를 이용해 연출한 농악(상모)놀이 장면. 벌판과 산자락이 만나는 곳에 달래강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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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과 더불어 조곡 운반하던 뱃길 역할
감물 유창리·불정 남창리 등에 漕倉 지명
목도까지는 노·삿대로 움직이는 배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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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이래로 강줄기는 그 자체가 인간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물류이동의 근간이 돼 왔다. 남한강을 포함한 한강 줄기 역시 한반도인들에겐 생명과도 같은 젖줄이었다.


선사시대 이후의 문화유적 다수가 한강과 남한강변을 따라 산재해 있고 뱃길, 즉 수운(水運)이 이뤄졌음을 알려주는 포구와 창고들이 아직도 곳곳에 흔적처럼 남아있음은 이를 입증해 준다.
 

수운은 단순히 강 하구의 해산물과 내륙의 농·임산물을 실어나르는 물류 이동 외에도 나라 살림의 근간이 되는 조세(세곡)를 운반(漕運)하는 중요 역할까지 담당해 왔다.


남한강과 그 지류인 달래강에도 오래전부터 조운이 이뤄졌음을 알려주는 조창(漕倉: 세곡을 보관하기 위해 강변에 설치한 창고)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초의 13조창 가운데 하나인 충주 덕흥창과 조선시대 조창인 연천 곶창(串倉), 앙엄 곶창이 그것이다.

 

고려 덕흥창은 지금의 충주시 가금면 강안의 여수포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연천 곶창은 충주의 서쪽 10리(가금면 창동리)에, 앙엄 곶창은 충주의 서쪽 60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들 조창을 통해서는 충주,단양,청풍,괴산,음성,연풍,제천 등지에서 걷힌 세곡이 수도의 경창(京倉)으로 옮겨졌다.
 

100년 전(일부 주민들에 의하면 1940년대까지)만 해도 소금배가 드나들었던 오간리 포구(괴산군 감물면 오간리)를 뒤로 하고 왼쪽으로 물굽이를 틀어 만나게 되는 곳이 유창리(有倉里)인데 지명에서도 풍기듯이 이 마을에도 조선시대 조창이 있었던 곳이다.

 

또 유창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불정면 남창리에도 조선시대 조창이 있어 인근지역서 거둬들인 세곡들을 달래강 뱃길을 통해 충주쪽 곶창으로 옮겼다가 다시 남한강 배편으로 경창으로 옮겼다.
 

지금으로부터 324년전인 1684년(숙종 7년) 발간된 규장각도서 괴산군 읍지 창고편에 보면 유창리 조창에는 쌀 93석 11말 4되 9홉 가량이 걷힌 것으로 기록돼 있다. 조창을 통해선 또 공물도 조달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충주·괴산 지역에서는 꿀,칠,대추,지초,여우가죽,수달피,삵가죽,족제비털 등이 바쳐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배편으로 서울까지는 얼마나 걸렸을까. 1930년 이영(李英)이 지은 ‘충주발전사’에 의하면 충주부터 하류까지는 결빙기나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매일 항행했는데 충주 탄금대(달래강과 남한강 합류점)로부터 서울 용산까지 약 315리를 여름철에 하행할 경우 약 12~15시간, 상행할 경우는 5~7일 가량 소요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강물이 많아 뱃길이 순조로울 경우이고 보통은 하행시간이 3일, 상행시간은 10일에서 2주일 가량 걸렸다고 한다.

 

배는 돛단배였으며 한 배의 적재량은 많게는 40석, 보통은 35~25석 가량이었다고 전한다.  

 

유창리에서 다시 하류로 내려가다 보면 강 건너 편에 ‘고려말 철안석불좌상(충북문화재자료 27호)’이 서있는 미륵댕이(지장리)란 곳으로 달래강 지류인 신항천이 흘러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도 예전에 소금배가 들렸다고 전하고 있다.

 

 

소금배 드나들던 미륵댕이
달래강으로 신항천이 흘러드는 미륵댕이에도 예전에 소금배가 들렸다고 전하고 있으나 지형이 크게 변해 있다.
 

이 미륵댕이를 조금 지나면 왼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커다란 바위가 나타난다. 이름하여 ‘구경바위’다.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면 인근경치가 구경할 만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경바위를 호기심에 올라서니 전해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니다.

 

동에서 북으로 굽이치며 흐르는 달래강 푸른 물결이 소나무 가지의 자유스런 몸짓과 어울어진 게 여간 멋진 게 아니다.

 

눈길을 돌려 수십길 아래를 바라보니 강물 위로 기다란 바위 면이  잠길 듯 말 듯 빼곰이 나와있다. 송장바위다. 얼핏 보니 진짜 물위에 떠 있는 송장처럼 보인다.

 

 

구경바위에서 바라본 달래강
괴산군 불정면 미륵댕이를 지나 목도쪽으로 가다보면 강변으로 깎아지른 듯한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는데 이름하여 ‘구경바위’다.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면 인근경치가 구경할 만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내는 구경바위에서 내려다본 ‘송장바위’
.

구경바위 건너 편으로는 또다시 오른쪽으로 절벽이 나타난다. 지금은 절벽 밑으로 유창리를 드나드는 도로가 개설돼 있어 옛 정취가 많이 사라졌지만 절벽 한 쪽에 ‘소금강’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을 정도로 예전엔 경치가 무척이나 빼어났던 곳이다.
 

북쪽을 향해 흐르는 달래강을 배경으로 ‘소금강’의 전경을 촬영하려 하는데 때마침 가을바람에 한층 높아진 하늘 위로 흰구름 한 무리가 산자락 끝에 매달려 재주를 부린다. 가히 절경이다.

 

 

괴산 목도 부근의 달래강
괴산 목도 인근의 구경바위 건너 편 절벽에는 ‘소금강’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을 정도로 예전엔 경치가 무척 빼어났던 곳이다. 북쪽을 향해 흐르는 달래강 물결과 먼 산 위로 피어 오른 흰구름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절경을 뒤로하고 이내 들어선 목도(괴산군 불정면 면소재지)에는 미리 약속한 향토사학자 김영수·김영식씨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차 한잔을 마시며 김영수씨로부터 “불정면 목도리는 예부터 ‘목나루’라고도 불렸는데 한자로는 기를 목(牧), 건널 도(渡)로 음성천과 달천강의 합수머리 들판서 말을 많이 길러 목나루라 한 것이 지금의 목도가 됐다”는 유래를 듣고는 예전에 목나루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목나루는 지금의 목도교 바로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김영수씨(74)에 의하면 남한강 줄기에는 두 개의 큰 나루가 있었는데 그 중 남한강 본류에 있는 충주 엄정면의 목계나루가 가장 컸고 그 다음으로 이곳 목도나루가 컸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목도가 불정면 소재지가 되면서 목도나루가 생겼고 1938년 인근에 제방이 쌓이면서 시장이 더욱 번창했으며 1959년 나루 바로 위쪽에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질 때까지 나루가 운영됐다고 한다.

 

 

예전의 목도나루를 설명하는 향토사학자 김영수(오른쪽)·김영식씨.

목도나루는 장호원-음성-목도-연풍-문경 혹은 장호원-음성-목도-입석-상주를 잇는 중요 길목으로서 주요 이용자인 음성군 소이면 일부와 괴산군 불정·감물면 전역, 장연면 일부지역 사람들이 여름에 보리 한 말, 가을에 벼 한 말씩 모두 380여 석을 모아 뱃삯으로 주었다고 한다.

 

목도나루의 나룻배는 낙찰제로 운영됐으며 대략 일년에 벼 160여 석에 낙찰됐다고 한다.

 

김씨는 또 남한강 뱃길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증언을 해줬다. 그에 의하면 남한강 본류까지는 커다란 황포돛단배가 다녔지만 지류인 달래강으로는 그보다 작은 배, 즉 노와 삿대로 움직이는 배가 다녔다는 것이다. 김씨는 그 배의 길이가 대략 22자 정도(6~7m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또 당시에는 배가 여울을 통과할 때 동원되는 장정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었으며 목도시장 안에는 주막도 많고 상점도 많아 ‘돈’이 많이 오갔기 때문에 주변에는 소위 어깨잡이들이 들끓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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